‘나의 아버지 히로타’ 조정행 감독

교직 퇴임 후 뒤늦게 영화 공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도전

아버지 100세 기념 영화상영회
역사 속에 숨겨진 아버지의 복원

 


[고양신문] 최근 영국의 전설적 록그룹 퀸의 스토리를 다룬 ‘보헤미안 랩소디’가 폭발적 흥행을 하며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의 국내 팬들이 그의 65돌 생일을 기리는 특별한 공연과 파티를 연 이야기가 주목을 끌었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유명인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흥미로운 상영회가 지난 8일 일산동구 백석동의 한 영화관에서 열렸다. ‘故 조대훈 선생 100돌 생신 기념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가 공식 행사명이다.

100여 명의 가족과 지인들이 모인 소박한 자리였지만, 이날 행사가 특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조정행 감독이 69세의 어르신이라는 것. 그는 전문 영화인이 아니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 은퇴 후 취미활동으로 영화공부를 시작한 그가 80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 필름을 거뜬히 완성해낸 뚝심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조 감독의 아버지 조대훈 선생은 일제 말 일본의 군수기업에 잠입해 파업공작을 주도하다 발각돼 오사카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때는 공산주의 활동을 펼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형을 살기도 한 좌익인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지워진 삶을 추적해 다큐멘터리 영상 속에 담아내고, 잊혀진 이름을 다시 역사 위에 당당히 호출해 낸 ‘항일 코뮤니스트 조대훈의 딸’ 조정행 감독이 궁금했다.

일산서구 탄현동의 세차장 건물 한쪽에 작은 창고방. 도대체 이 안에 뭐가 있을까 싶을 만큼 썰렁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벽 한쪽을 수백장의 영화DVD가 채우고 있고, 정면과 천장에는 스크린과 프로젝터가 걸려있다. 넓은 책상 위에는 영화관련서적과 포스터, 스틸사진도 널려 있다. 조정행 감독이 이끄는 영상모임 ‘아지트’ 회원들이 함께 모여 영화 감상을 하는 감상실이자, 조 감독의 영상작업실이다. 그는 이곳에서 장편 극영화 ‘방석’(2016년 작)에 이어 장편 다큐멘터리 ‘나의 아버지 히로타’를 최근 완성했다. 그의 목소리로 삶과 영화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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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행 감독 구술기록

세 개의 이름 가진, 사랑하는 내 아버지…

항일 노동운동가 히로타, 코뮤니스트 조병규,
두 이름 지우고 가족 위해 숨죽이고 산 조대훈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내가 인터뷰 주인공이 되기는 처음이네요. 나는 37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가 2014년 고양시 장성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을 1년 앞당겨 퇴직을 했습니다. 교직에만 전념하다 보니 아무 계획 없이 백수가 돼 생각 없이 몇 달 푹 쉬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낮의 아파트 단지가 쥐죽은 듯 조용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모두들 뭔가를 하러 어딘가로 나간 것이지요. 집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파주 한빛마을 집과 교하도서관을 오가며 출근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런 저런 책을 펼쳐보았는데, 영화 관련 책들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교하도서관에 있는 영화관련 책들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자연스레 남은 인생의 취미를 ‘영화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게 됐지요. 영화를 실컷 보며 보내는 노년도 괜찮겠다, 싶었거든요.

마침 친한 친구가 작은 빈방이 하나 있다고 해서 영화 아지트를 꾸렸어요. 아지트라야 스크린 걸어놓고 가끔 친구나 후배들을 불러 모아 함께 영화를 보는 정도지만. 처음 본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워 호스’라는 작품인데, 나는 너무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다 꾸벅꾸벅 졸지 뭐예요(웃음). 다들 일하고 살림하느라 바쁜 사람들이라 그러려니 했죠.

그러다가 지금의 세차장 한 칸 공간을 소개받았어요. 휑한 창고 같았지만, 잘 꾸미면 나름 괜찮은 공간이 되겠다 싶어 얼른 방을 얻었지요. 사실 월세가 싼 게 제일 큰 매력이었지만 말입니다(웃음).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모임 ‘아지트’를 시작해 DVD도 하나씩 사 모으고, 외장하드에 파일을 저장하다 보니 지금은 소장하고 있는 영화가 500여 편 됩니다. 영화 마음껏 보고, 혼자만 읽는 감상문 쓰고…. 행복한 시간이었죠.

겁도 없이 도전한 첫 장편 ‘방석’

그러다가 고양영상미디어센터에서 영상과 시나리오를 가르쳐 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선 시나리오 강좌에 등록을 해 공부도 하고 습작도 썼는데, 담임강사인 김진수 선생님이 “시나리오 재밌게 잘 쓰시네요” 하시는 게 아녜요?. 지나가는 말로 한 것 일수도 있지만, 그 칭찬 한 마디가 나에게는 엄청 큰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줬어요. 내친김에 미술 공부도 하고, 카메라 촬영기법도 공부했지요. 그렇게 영화의 기초과정을 골고루 익힌 후, 겁도 없이 덜컥 첫 장편 극영화에 도전했어요. 친구의 연애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사실 이전까지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 한 번 해본 적 없었는데,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배우 오디션을 보고, 스태프를 캐스팅하며 영화의 완성을 향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지요. 그렇게 2016년 4월에서 7월까지 촬영을 해 ‘방석’이라는 독립 극영화를 완성하고, 곧바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상영회도 열었어요. 제작비 3000만원은 퇴직금 일부를 털어서 충당했어요. 해외여행 몇 번 가는 대신 내 이름을 담은 영화가 한 편 태어난 셈이지요(웃음).

영화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대체로 괜찮았어요. 러닝타임은 90분이었는데, 45분짜리로 다시 편집해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해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첫 작품이라 여러 가지 부족함과 아쉬움은 많았지만, 생애 첫 작품을 만든 감격이 컸지요.
 


두 번째 작품은 ‘아버지 이야기’

첫 영화 완성 후 다음 소재를 구상하다가, 불현듯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구한 일생을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 그 분의 세대가 살아낸 파란만장한 역사를 돌아볼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는 불령선인(사상이 불순한 조선인)으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좌익사범으로 옥고를 치르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셨어요.

처음엔 데뷔작처럼 극영화를 만들까도 생각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를 영상으로 재현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다큐멘터리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딸의 입장에서 역사 속에 봉인된 아버지의 실체를 뒤늦게나마 해방시켜드리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마침 올해가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100세를 맞는 해여서 아버지의 생신잔치 기념으로 딸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선물해 드려야겠다, 마음먹었지요.

하지만 막상 작품을 시작하려니 막막하더군요. 아버지는 안개 속의 인물이었으니까요. 평생 가족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입 밖에 내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황해도가 고향으로 일본 명문대 릿쿄대학을 졸업했고, 일본의 군수업체인 오오다니 중공업에 다니던 중 파업을 주도해 오사카형무소에 수감됐고, 6.25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53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것 정도였으니까요.

10개의 직업 전전했던 어깨 무거운 가장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오로지 아내와 5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기 위해 10개의 직업을 전전하며 인생을 바치신 분이었어요. 혹시라도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줄까봐 단 한 번도 정권이나 대통령 욕을 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자랐어요. 딱 한번,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버지께서 깊은 한숨을 쉬시며 “이건 조작이야…”라고 혼잣말을 하며 괴로워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덕분에 길음동 미아리에서 고생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달동네촌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만 5남매가 모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어요. 특히 여자는 학교 다니는 친구가 거의 없던 시절에 딸들에게도 당당히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신 아버지가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70년대 초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나에게도 미행이 따라붙곤 했습니다.

형제 중 유일하게 막내는 80년대 대학을 다니며 골수 운동권이 됐어요. 신군부의 폭압이 절정에 치닫던 시절 성남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시 막내가 안기부에 의해 안가로 끌려갔을 때 어머니께서 혼절할 듯 쓰러지시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이념 서적 200권을 다 태워버리자 동생이 이불을 쓰고 통곡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도 아버지는 그저 담담히 지켜보시기만 하셨대요.

절판된 책에서 찾은 이름 ‘히로타’

아버지의 삶은 2가지 측면에서 조명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요. 우선은 가족을 책임진 한 명의 가장으로서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이라는 점이지요. 그런 분들 덕분에 오늘날 후손들이 윤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더 흥미로운 부분은 역사 앞에 당당히 맞섰던 젊은 시절 아버지의 삶이예요. 이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 릿쿄대, 오사카 국립자료관 등의 사이트를 두루 검색했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 같은데, 창씨개명한 이름을 아무도 몰랐거든요.

그러던 중 1980년대 출판됐다 절판된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을 발견했어요. 일본 군수기업인 오오다니 중공업에서 광전병규(廣田病奎)가 조선인 노무자 100여 명을 규합해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됐다는 내용이었어요. 아버지의 개명 전 이름이 조병규, 히로타(광전, 廣田)가 아버지의 창씨개명한 성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지요. 고향 황해도 연백평야의 드넓은 밭을 떠올리며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며 지은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환한 빛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자료를 살펴보니, 광전병규가 이끈 파업은 단순한 파업이 아니었어요. 영화 군함도에서 묘사된 것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공부한 아버지가 항일 혁파작업을 수행한 것이었어요. 좌·우를 떠나 아버지가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운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그 길로 출판사 백산서당에도 연락을 해 책을 구해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출판 직후 신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며, 판본과 원고까지 모조리 압수당해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는 답변만 들었어요. 저자 이재화씨도 펜을 놓고 출판계를 완전히 떠났다고 하더군요.

조각난 퍼즐 맞춰 다큐멘터리 완성

아버지의 이름 ‘히로타’를 손에 쥐고 바로 일본으로 날아갔어요.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일본 공공기관의 역사자료 공개를 협조 받는 게 너무 어럽더군요. 감옥에서 나온 후 ‘조대훈’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조병규, 그리고 광전병규와 동명이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자체가 난관이었어요.
국립고문서보관소와 오사카형무소 등을 드나들었지만, 당사자 본인이 아니면 정보공개를 하기 힘들다고 거절당하기도 했어요. 법적인 준비를 하고 찾아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릴 작정이예요.

영화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역사적 사료, 그리고 딸로서의 직관과 상상을 더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보는 방식으로 완성했어요. 조각조각의 퍼즐을 짜 맞추었다고나 할까요. 다큐멘터리는 완성했지만, 아버지의 삶에 대해 좀 더 풍부하고 직접적인 자료들을 취합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래도 세상이 많이 바뀐 덕분에 이런 영화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다행스러워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우리 시대가 겪어 온 빨갱이 콤플렉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공산주의자겠지만, 한편으로는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청년이기도 하잖아요.

사실 영화 포스터에서도 ‘코뮤니스트’라는 말을 뺐어요. 그런데 영화제작에 큰 도움을 준 분이 저를 질책하시더군요. 그걸 당당히 밝히지 못한다면 이 다큐는 절름발이에 불과하다고 말이예요. 수긍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우리 아버지를 역사의 감옥에서 끄집어내 드리려고 해요. 나는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꽃 같은 청춘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항일 코뮤니스트였다고.

아버지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해요. 아버지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을 그동안 부정하고 살았던 내 삶 역시 반쪽이었기 때문이지요. 막상 말해놓고 나니 홀가분하고 두려움도 사라지네요.
 


세 개의 이름 가진 그리운 내 아버지…

다큐멘터리 상영회는 성황리에 진행됐어요. 영화관 129석이 꽉 찼거든요. 지인과 가족, 형제들이 주로 찾아왔고,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 축하를 하러 찾아와 주셨어요. 나의 아버지 히로타의 삶을 보며 관객들은 각자 자기 부모 세대의 삶을 생각했다고 하더라구요.

‘나의 아버지 히로타’는 경기도 영상미디어센터 몇 곳에서 상영 계획이 잡혔어요. 영화제에도 출품할 계획이구요. 가능하면 내가 만든 다큐를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예전의 나처럼, 뒤편에 숨어있는 이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당사자들은 물론, 그 자녀 세대까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잖아요. 영상이든 기록이든 구술이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정년 퇴임 후 만난 ‘영화’라는 친구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내가 동시에 역사 앞에 커밍아웃 할 수 있는 용기를 줬어요. 누군가를 악인으로, 또는 적으로 만드는 편협함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경지가 영화 속에는 담겨 있어요.

그런 세상을 현실에서 열어가기 위해서라도 아버지와 같은 이들의 이름이 제대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제에 의해 탄압받은 히로타, 해방 후 반공주의의 표적이 된 조병규, 그리고 두 이름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숨죽이고 살았던 조대훈. 이 세 이름은 모두 다 나의 아버지의 한 부분이예요. 누구보다 정의롭고,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고, 누구보다 인자했던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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