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강경민 일산은혜교회 목사

솔직한 감정 내뿜는 노래에 진정성 담겨
동성애자에 대한 깊은 이해의 시선
한국 교회의 보수적 경직성 되돌아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고양신문] ‘보헤미안 랩소디’는 전설적인 락 가수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노래 이름이다. 이 영화가 프레디 머큐리의 생애를 그린 영웅의 전기는 아닌 듯싶다.
한국에서 개봉된지 채 두 달이 안돼서 관객 850만을 돌파했다. 이 영화에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영화 평론가나 사회심리학자들의 몫이다.

지난 주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아들이 티켓을 마련해주면서 아빠한테는 이 영화의 음악이 거슬릴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과 청중을 열광시킨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은 나에겐 너무나 생소한 락이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 지독히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락은 사탄을 찬양하는 음악이다. 락 레코드를 뒤로 돌리면 사탄을 찬양하라는 가사로 충만해 있다는 거짓 뉴스에 속으면서 성장해 왔다. 그런 나에게 락이 친근감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같은 보수신앙의 배경을 가진 아내는 달랐다. 음악의 영역이 락이냐, 오페라냐, 뮤지컬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그의 음성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 그것만으로 매혹되어 있었다. 당연히 아내는 영화에 깊이 심취되었다.
나는 어땠을까? 신통하게도 사탄을 찬양하는 도구로만 알고 있던 락이 싫지 않았다. 나 역시 점점 락 음악의 진정성에 빠져들고 있었다. 가사 내용이 경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다만 인간의 고뇌를 열광적인 곡조에 담아 숨김없이 뿜어내는 그 감성의 진정성에 매혹 당했을 뿐이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천차만별의 인간감성을 가사와 곡을 통해 뿜어냄으로 인간의 현실과 한계를 드러내고 극복하고 치유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성경의 시편을 보면 경건의 극치만 나타나있지는 않다. 거의 반절에 가까운 시가 인간의 상한 마음, 상처받은 심정, 깊은 탄식과 저주의 감정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경건한 가사, 경건한 곡만 진정한 음악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은 그 허다한 사람들의 감성을 담아낼 수 없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영화로서 성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와 세대를 넘어선 음악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다. 락을 사탄 찬양의 도구로 생각하고 터부시 해왔던 나 같은 사람도 침몰시켰으니 음악의 힘이 새삼스러워진다.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있는 듯 없는 듯 한 탄탄한 구성, 스토리의 힘이 아닌가 싶다. 비행장에서 수하물을 취급하는 노동자로 살아가던 외국인 청년은 그야말로 국외자요 3류 시민이었다. 그가 밴드의 일원이 되더니 그의 잠재적 소질이 폭발되고 그는 마침내 밴드 퀸의 당당한 리더가 된다. 인기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준 친구들을 배신하고 솔로로 대성할 것을 꿈꾸지만 그의 꿈은 좌절된다. 옛 친구들을 찾아 솔직한 자기 고백과 뉘우침을 통해 싸늘한 친구들의 냉대를 극복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밴드 퀸을 다시 세계적인 밴드의 자리로 이끈다. 그의 인간승리가 오늘날 헬 조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간과한 지나간 감독의 숨겨진 의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레디 머큐리는 자라가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처음 만난 여인에게 바친 순정도 자신의 성정체성 안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런 저런 시련을 겪지만 시련 속에서도 자신 안에 잠재된 탁월한 음악성을 계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자신의 고뇌를 극복해가는 인간승리의 과정이 감동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끝내 동성애자로서 살다가 에이즈에 걸려 45세의 젊은 나이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가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보헤미안 랩소디'를 세상에 선보였을 때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세상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락 음악의 대가였고 그가 락을 통해 내뿜는 인간의 절절한 고뇌는 여러 가지 모양의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가 된다. 그가 죽은 다음 그가 남긴 많은 재산은 동성애자들의 치료를 위해 기탁된다.

나는 이 영화의 감독이 동성애를 칭송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감독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도덕적 설교자는 더더욱 아닐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동성애는 하늘이 내린 벌이니 동성애 치료약을 개발하는데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레이건 대통령식의 접근방식으로는 동성애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전혀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진리이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눈곱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정죄가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 꼴보수 정당이나 정치인들도 보수교회의 그 경직성을 이용해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비열한들이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간적 이해의 폭과 깊이가 최소한 이 영화를 만든 감독만큼은 돼야 예수님의 제자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내내 솟구쳤다.

강경민 일산은혜교회 목사.

음악이 주는 감동과 주인공이 순간순간 내뱉는 촌철살인 같은 인간적 절규 때문에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관객들이 다 나간 후 아내가 먼저 일어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꼭 강추하고 싶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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