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정끝별 시인 강연

늙음과 죽음에 대한 진지·유쾌한 성찰
백세시대 중년들에 속깊은 격려 건네

 

한양문고·알뜨레노띠가 마련한 첫 특강
월1회 특급강사 초청해 공개강연 진행

 

한양문고 & 알뜨레노띠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시리즈의 첫 강사로 초청된 정끝별 시인.

 

[고양신문] 나이듦을 주제로 삼은 시선평론집 『삶은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를 펴낸 정끝별 시인(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이 주엽동 한양문고를 찾아 독자들과 만났다. 2019년을 맞아 한양문고가 이탈리아 프리미엄 매트리스전문업체인 알뜨레노띠의 후원을 받아 의욕적으로 기획한 ‘한 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특강의 첫 강사로 초청된 것.

70개의 좌석이 가득 찰 만큼 뜨거운 관심 속에 시작된 강연에서 정 시인은 “내가 늙었다고 느낀 적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는 뜻을 지닌 ‘메멘토 모리’라는 경구를 소개하며 “늙음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시간에 대한 인식은 문학이 고대로부터 추구해왔던 지치지 않는 궁극적 주제”임을 상기시켰다.
“글과 생각, 사유가 궁극적으로 봉착하는 지점은 바로 시간입니다. 나아가 삶과 사랑, 종교와 과학조차도 결국은 시간의 유한성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1964년생, 올해로 57세가 된 정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40대 후반이 되면 늙음과 죽음을 주제로 창작 작업을 펼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너무 젊거나, 너무 늙지 않은 때에 문학과 예술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성찰을 하고 싶었다는 것.
 

시와 함께 나이 드는 즐거움

그는 나이듦에 당당히 대처하도록 격려와 용기를 주는 사자성어 3개를 소개했다. 첫 번째는 일소일로(一笑一老). 원래는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를 내면 한 번 늙는다는 뜻의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로 쓰지만, 정 시인은 앞과 뒤를 잘라 붙여 “한 번 웃으며 한 번씩 행복하게 늙어가자”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두 번째는 백세시락(百世詩樂). 그는 “나이듦과 가장 어울리는 문학형식이 바로 시”라며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호모 헌드레드’시대를 맞아 시를 벗삼아 노년을 풍요롭게 향유하자고 권유했다.
“신경림 시인이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고 노래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이 비로소 보인다는 것은 노년에게 주어진 커다란 기쁨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그가 제시한 사자성어는 백발성성(白髮星星)이다. 많이 쓰는 말이지만, ‘성성’이 빛나는 별, 또는 흥성스럽다는 뜻을 지닌 한자를 쓴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고 말하며 “늙음을 상징하는 백발에 별이 반짝반짝한다는 표현이 멋지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잘 살았다 자부하며 죽음 다가가야

정끝별 시인은 롱펠로의 시 한 구절 ‘저녁 빛이 희미하게 사라질 무렵, 하늘은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를 인용하며 늙음은 결핍의 시기가 아니라, 젊음과는 다른 세계를 보고 누리는 가치중립적 시기라고 말한다. 이어 “죽음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한가하게 지낼 수 없다”고 말한 베케트의 말을 빌려 불멸의 지루한 삶보다는, 우리 생의 끝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고 역설한다.
“끝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나는 매일 잠자리에 들며 의사죽음을 경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두려울 이유가 없지요.”

정 시인은 하루를 열심히 산 사람이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듯, 여한 없이 잘 살았다고 자부하며 죽음에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끝별 시인이 강연에 참여한 청중들 사이를 오가며 친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환대와 적대, 죽음을 대하는 두 태도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자세는 천차만별. 정끝별 시인에게 죽음에 대처하는 극단적 두 경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 인물들은 바로 부모였다. 가부장적이었던 정 시인의 아버지는 60대 중반부터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묘지를 준비하고, 유언을 작성하고, 나중에는 외출복을 버리고 병원에도 발길을 멀리하며 긴 노년을 보냈다는 것. 말하자면 죽음을 ‘환대’한 셈이다.

반면 정 시인의 어머니는 흰머리를 족족 뽑아내듯, 철저한 자기관리로 늙음과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저항하려 했다고 한다. 죽음을 ‘적대’한 셈이다. 환대와 적대. 정끝별 시인은 죽음을 대하는 이 두 가지 태도에서 영감을 얻어 쓴 ‘죽음의 방식’이라는 자작시를 청중들에게 들려줬다. 그러면서 “두 가지 태도 중 어느 것이 옳다는 가치 판단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기도 했다.

 

내 삶의 ‘말년의 양식’을 찾아볼까

속내 깊은 정 시인의 안목이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은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다. 말년의 양식이란 위대한 예술가들이 말년에 격식과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독특한 형식을 추구하는 경향을 일컫는 용어다.

그는 이 개념을 일본의 대문호 오에 겐자부로가 75세에 쓴 소설 『익사』를 읽으며 접했다고 밝혔다. 소설의 전통적 형식과 서사를 무시한 듯 쓴 소설에서 오히려 거장의 생을 관통하는 다양한 모티프들이 서로 충돌하는 힘과 재미를 느꼈다는 것.

이어 오에 겐자부로가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말년의 양식』의 주제를 문학으로 시도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아가 사이드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에게서, 아도르노는 다시 발터 벤야민이 쓴 한 문장의 아포리즘에서 ‘말년의 양식’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발전시켰다며 현자들의 ‘계보’를 짚어준다.

또 하나의 예로 독일의 문호 마르틴 발저가 쓴 『앙스트블뤼테』(불안의 꽃)라는 작품을 거론하며, 정 작가는 “생존이 위태로운 생명체가 마지막 꽃과 씨앗을 맺으려는 노력이 말년에 이를수록 긴장과 분노로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정끝별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도 ‘말년의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찾아내고 있다면서 “기형도, 김소월이 죽기 전에 남긴 작품 속에서 낯선 저항성과 부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묵직한 ‘선동’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말년의 양식’을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면에서 늘 꿈꾸었지만, 체제에 순응하며 덮어두었던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의 ‘앙스트블뤼테’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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