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2)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고양신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양땅에서 일어난 항일의 흔적을 정리하는 기획의 두 번째 시간은 1910년 경술국치 이전의 역사를 짚어보려 한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한양 외곽 한강 하구의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고양군에도 19세기 말부터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20세기 시작과 경의선 철길을 따라 군홧발을 앞세운 일제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조선이라는 무능력한 조정은 백성들에게 아무런 방패막이가 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기울어가는 나라를 끝까지 구해보겠다고 나선 이들은 땅만 바라보며 살던 민초들이었다. 끼니를 줄여 나라의 빚을 값아 보자는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펼쳤고, 그마저도 없는 이들은 목숨을 내걸고 의병전쟁에 가담했다.

전국에서 국채보상과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히 펼쳐진 곳 중 하나가 고양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압도적 규모의 사건은 없지만, 어느 곳보다 참여빈도가 높다는 점은 고양 독립운동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민중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변변한 무기나 조직을 갖추지 못했던 초기 의병들의 모습.

 
못난 나라 조선, 수탈의 땅 고양…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뼈아픈 질문을 던져보자. 고양의 민초들에게 조선은 과연 목숨을 바쳐 지킬만한 나라였을까. 임금은 백성들에게 ‘구국의 대열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라’고 말할 염치가 있는 존재였을까. 객관적 사료들은 불행히도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다.

왕실은 고양의 드넓은 산림을 사냥터로 지정해 금표를 세우고 출입을 금했다. 기록에는 왕실의 놀이터에서 땔감을 구하던 고양군 양민이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뿐 아니라 궁과 관청 소유의 양·돼지 농장에서 고양의 백성들이 노동력을 바쳐야 했고, 고양땅에 산재한 왕릉의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와 노동도 고양땅에서 감당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중국을 오가는 사신 일행의 여비를 경유지 인근 고을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벽제관을 끼고 있는 고양군민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다.

이러한 상황은 신식제도를 도입한 갑오경장(1894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1895년 고양군의 직제와 급여를 살펴보면, 군수부터 객사직까지 11개 직급이 있었는데 군수의 월급이 58원, 서기가 5원, 사령이 3원, 객사직이 1원이다. 당시 쌀 1석 가격이 10원 정도였다고 하니, 그나마 군수는 한 달에 쌀 6가마를 받지만 서기는 3말, 객사직은 1말 정도가 지급됐던 것이다. 누가 봐도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이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관원들이 청렴하게 살았구나, 생각하면 순진한 해석이다. 나라에서 공무원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각자 알아서 백성들로부터 수탈해 살아가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한양과 인접한 고양군은 권세와 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층에게는 기회와 풍요의 땅이었겠지만,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민초들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수탈의 땅일 수밖에 없었다.

 

미친 듯 달리는 쇠당나귀에 돌을 던져라

일상화된 수탈이 이어진 땅이었지만, 그래도 내 나라 내 동포끼리 지지고 볶는 상황이니 견뎌야 했다. 하지만 개화와 함께 더 비참한 역사가 시작됐다. 제국 열강들이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고, 최종 승자의 윤곽은 불행히도 가장 치밀한 야욕을 과시한 일제였다.

고양땅을 가로지른 경의선은 일제가 조선의 이권을 두고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러시아와의 일전을 벼르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다. 때문에 경의선 부설 과정에서 유례없는 속도전을 펼쳤고, 고양에 병참소를 설치한 후 민초들에게 부역과 공출을 압박했다.

수탈에 이골이 난 민초들이라지만 나랏님도 아닌 일본놈들에게 뜯어먹혀야 하다니, 이건 아니지 싶었던가보다. 이곳저곳에서 부역과 공출을 거부하고, 일본인 관사나 질주하는 기차에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총으로 무장한 제국의 군대에 돌을 던져 싸우겠다니 너무도 무모한 저항 아닐까. 하지만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이 오늘날에도 연출되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극한의 상황에서 분출하는 본능적 저항의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왜놈들의 패악질

민초들의 분노는 자국의 무력을 등에 업고 패악질을 일삼는 고양땅 일본인들을 향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백주대낮에 양민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갈취하고, 부녀자를 욕보이는가 하면, 이에 맞선 집주인을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하는 일이 경의선이 지나가는 마을 곳곳에서 빈번히 발생했다.

한성부재판기록을 보면 고양군의 한 장터에 나갔던 일본인이 조선사람 7~8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도 등장한다. 고양땅을 밟고 거들먹거리는 일본인을 향한 민중적 분노와 적개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밖에도 고양땅에 일본인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충돌과 갈등의 흔적들을 당대의 여러 기록에서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나랏빚 갚으면 국권이 회복되려나

1907년 정미년은 고양의 항일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다. 일제는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한다. 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한다. 국가 존립 근거의 마지막 보루가 사라진 것이다.

국운이 풍전등화에 처했음을 감지한 백성들은 마지막 구국의 불꽃을 치켜든다.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살펴보자. 잘 알다시피 대구의 민족자본가들로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백성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국채를 갚아버리자는 운동이었다. 앞서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차관을 조선에 제공했고, 조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나랏빚을 갚을 능력도 전략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는데, 놀랍게도 고양땅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서는 국채보상운동 성금 기탁자 명단을 지속적으로 게재했는데 사포면, 송산면, 구이면, 사리대면, 원당면, 구지도면, 신혈면, 하도면, 중면 등 고양시 9개 면 전 지역에서 명단이 발견된다. 구체적 마을이름을 살펴봐도 대화리, 대자리, 덕이리, 구산리, 가좌리, 문봉리 등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라 위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분과 나이 뛰어넘어 모두가 십시일반

기탁자는 지역 뿐 아니라 신분과 연령도 무척 다양했던 것 같다. 집성촌에서 촌장 이름으로 성금을 기탁하기도 했고, 사리대면 빙석동(지금의 문봉동 빙석촌)의 한 사립학교에서는 어린 학동의 이름과 교장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1907년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고양군에서 총 498원 53전과 백동화 4천237량 55전이 국채보상성금으로 기탁됐다고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전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성금을 낸 이들이 재산을 가진 양반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최천쇠, 염옥돌, 박돌근과 같이 양반이라고 보기 힘든 이름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나라 빚을 갚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에는 귀천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엇갈린다. 민족구국운동임에는 분명하지만, 일본의 침탈 저의를 단순히 자본의 예속화쯤으로 착각한 양반님들의 순진한 운동이었다는 비판도 일부 제기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동참한 백성들의 착하고도 숭고한 마음이 폄훼될 순 없다. 나라가 진 빚을 백성들이 갚겠다고 나선 모습은 정확히 90년 후 찾아온 IMF 당시에도 금반지와 금수저를 모아 텅 빈 나라 곳간을 일부나마 채워보겠다고 나섰던 장면으로 다시 재현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국채보상운동을 거치며 근대적 주권의식이 싹텄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 고양땅의 선조들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이러한 내용을 처음으로 정리·발표한 『고양 독립운동사』의 저자 이정은 교수는 “참여지역과 인원수에 있어 3.1운동보다도 더 광범위한 동참” 이었다고 평가한다.
 

생존을 향한 마지막 항거, 의병

국채보상운동이 합방 전 가장 광범위하게 펼쳐진 구국운동이었다면, 가장 치열하게 타올랐던 무력항쟁은 바로 의병운동이다. 의병(義兵), 이름부터가 슬프고 비장하다. 모름지기 군대라면 소속된 국가나 정부가 있어야 할 터인데, 의병은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가 하늘 아래 떳떳하고 옳은 일이라는 믿음만이 존재를 지탱해주는 근거였다.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해 19세기 말 반일·반외세를 표방하며 지방 유림을 중심으로 시작된 초기의병운동의 기록은 고양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1904년부터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의병운동은 초기와 달리 신분적으로 평민(전체의 97%)과 농민(전체의 80%)들로 주축이 바뀐다.

양반들의 거병이 대의와 명분에 의한 것이라면, 민중이 생업을 파하고 무기를 잡았다는 것은 생존의 절박함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인 벼랑 끝에서 무기라도 한 번 잡아보겠다는 본능적 분노가 표출된 것이니, 그만큼 민초들의 삶이 철저히 파괴됐다는 점을 방증한다 하겠다.

농민들에 이어 총포단속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포수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 유명한 독립군 영웅 홍범도가 바로 명포수 출신 의병으로 항일의 이력을 시작한다. 또한 광산과 철도노동자로 부역하던 이들도 대열을 이탈해 의병에 합류한다.

이러한 가운데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이른 군대 해산이 의병항쟁의 분수령이 된다. 무장을 갖춘 전문 군인들이 의병부대의 면모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영국 기자가 1908년 무렵 촬영한 의병부대의 모습.


강화에서 시작된 경기북부 의병운동의 불꽃

고양땅의 의병활동에 직접적 영향을 준 부대는 군대해산 전 강화도에 주둔했던 1000여 명의 강화진위대다. 수도 한양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을 지켰던 이들은 가장 먼저 근대식 군사시설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군대해산 후 파주, 연천, 포천, 양주 등 한양 외곽 경기 북부지역으로 흩어져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수백명의 조직을 결성한다.

무장과 전술에서 전문적 체계를 갖추게 된 의병들은 마침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대를 조직하고 1908년 대규모 서울 연합공격을 감행한다. 가히 국운을 걸고 벌인 마지막 항일 민족전쟁이었다. 하지만 압도적 전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에 퇴각한 이후 소규모 게릴라 전술로 전환하게 된다.

의병들의 궤멸이 조선 병탄의 마지막 과제로 여긴 일제는 1909년 대규모 병력을 집중해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한다. 이들은 의병과의 전투는 물론, 양민들을 대상으로 방화와 살상, 약탈 등을 자행했다. 결국 구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의병들은 하나 둘 역사의 저편으로 사위어갔다.
 

해산 직전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후 의병의 주력 부대가 된다.


의병전쟁의 치열한 격전지 고양땅

고양에 근거지를 둔 의병부대는 어디일까. 답은 ‘없음’이다. 지형상 평야지대인 고양땅은 의병들이 은거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섭섭해 할 것 없다. 고양은 주둔지는 아니었지만, 의병 유격전의 주요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서울 서북쪽 외곽으로 향하는 일본 군인들의 보급로와 이동로가 고양을 지나야 했기 때문에 파주나 양주 등에 주둔한 의병부대들이 수시로 진격해 기습작전을 전개했던 것.

고양군을 비롯해 경기서북부 전체를 무대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허위 대장의 부대는 병력이 300여 명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반면 휘하에 고작 1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소규모 의병부대의 이름도 10여 개나 눈에 띈다. 『고양시사』는 심성완·박래봉·박순근·연기홍·유춘열·이근칠·허위·안두식·안익선·황재호 부대를 고양군 지역에서 활약했던 주요 의병부대장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좀 더 다양한 사료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이름이 조명되기도 한다. 고양군 마두리 출신의 김창식은 이인영 총대장의 우군장으로 활약했던 의병장이다. 휘하에 부하 150명을 이끌고 고양과 양주, 포천을 넘나들며 군량미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던 그는 경기북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09년 충북으로 이동해 이기상 대장 등과 합세해 의병전투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동일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로 연기우 의병장을 꼽는다. 강화진위대 출신 연기우 의병장은 북한산의 천년고찰 흥국사를 주요 거점으로 삼아 박석고개에서 고양과 양주로 넘어오는 일본군에 맞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고양땅은 경기북부 의병전쟁의 주요 격전지였다. 연기우 의병장이 흥국사를 거점 삼아 활약했던 북한산 일대 마을.


민초들도 함께 치러야 했던 슬픈 전쟁

하지만 의병전쟁은 빛나는 자부심으로만 기억할 수 없는, 처참하고 슬픈 전쟁이었다. 일제가 의병들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의 목록을 보면, 주무기는 화승총이고 여전히 활과 칼, 창 등 재래 무기도 등장한다. 러시아마저 격파했던 당대 최강의 일본군대에 맞서 빈약한 무기로 승산 없는 전투를 치른 것이다.

무기의 열세는 전략과 투쟁의지로 극복한다 해도, 식량과 물자의 부족은 해결하기 힘든 한계였다. 민가가 있는 고을에 내려와 식량을 조달해야 했지만, 민가라고 물자가 넉넉할 리 만무했다. 사정이 이러니 수시로 출몰하는 의병의 존재는 고양땅의 양민들에게도 커다란 부담이 됐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가까이 수십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했다는 사실은, 의병 뿐 아니라 고양땅의 수많은 민초들이 직·간접적으로 의병항쟁을 함께 치러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의병을 궤멸하려는 일제의 전략은 집요했다. 직접적 전투는 물론, 의병과의 연계가 의심되는 양민들에게 무자비한 위해를 가해 의병과 민초들의 대오를 분열시켰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나며 양민들 중 의병을 밀고하는 자가 나오고, 의병 스스로 대열에서 이탈해 투항하는 이들도 증가한다. 결국 식량과 무기가 고갈되면서 두 해 동안 면면히 이어진 고양에서의 의병전투는 자취를 감춘다. 남은 병력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넘어가 독립군이 돼 항일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의병 토벌작전에 동원된 일본군인들이 열차를 통해 이동하고 있다.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전라도 의병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

500년을 이어 온 나라가 국가적 무력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무너졌다. 그나마 땅을 일구며 살던 민초들에 의해 나랏빚 값는 운동이 펼쳐지고, 의병들에 의해 마지막 무력 항쟁이 타올랐다는 사실마저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사는 얼마나 더 초라했을까.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전쟁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가 고양땅이었음을 꼭 기억하도록 하자.

하지만 무능하고 무책임한 조정의 백성으로 산 댓가로 치른 의병전쟁은 총을 든 이나 농토를 지킨 이 모두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고통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 간 민초들의 죽음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숙연케 한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 그들의 외롭고 숭고한 희생이 역사의 고비마다 용기를 북돋는 기억이 돼 주리라.

■ 도움말 : 이은만(문봉서원장), 이영찬(고양시씨족협회장), 백창환·이철민(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최경순(향토사학자), 정동일(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

■ 참고자료 : 『고양 독립운동사』(이정은, 광복회고양시지회), 『고양시사』(고양시사편찬위원회), 『고양 1920's』(송종훈, 무일근대연구소), 『자랑스런 고양 100인선』(이은만, 고양신문),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정동일, 고양시), ‘고양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자료집’(광복회고양시지회), ‘신문기사 속 1920년대 고양’(최경순), ‘행주나루터 선상 만세운동 토론회 자료집’ 외(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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