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상만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양신문] 올해의 3‧1절은 100년을 맞이한다. 그리고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야말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의 주권을 강탈당한 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까. 그런 지경에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남녀노소가 들고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저항한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투쟁사였다.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 이후 2달여 간 서울과 평양 등 경향 각지에서는 1500여 회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참여한 인원만 2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공식 기록이다. 이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당시 우리나라 총 인구를 봐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1919년 당시의 인구 통계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1925년 우리나라 총 인구를 1299만7611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전 국민의 17%가 일제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며 저항한 것이다. 실제로 만세운동 과정에서 일제는 우리 국민 7500여 명을 살해했으며 1만6000명이 부상, 그리고 4만6000명은 투옥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선조들의 뜨거운 피와 눈물이 점철된 3‧1운동 100년을 맞이하는 오늘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은 어떤가? 선조들이 피 흘려 되찾은 이 나라에서 과연 민족정기는 바로 서고 있는가. 그리고 민족을 반역한 자들에 대한 온당한 단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이러한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에서 조사 공무원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된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이완용 등 민족반역자들이 친일 행위를 대가로 취득한 토지를 국가귀속해 독립운동가를 위한 재원으로 쓰는 일을 했다. 그리고 4년간의 활동을 통해 168명의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소유하고 있던 땅, 2359필지(1113만9645㎡)를 국고로 환수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 1.3배에 해당한다. 굳이 액수로 치자면 공시지가 959억원, 시가로는 2106억원이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당시 일각에서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제 36년 강점기간 동안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자 168명의 재산을 국가가 귀속한 것을 비난하는 이들을 보며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기억의 조각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드골이다. 프랑스는 1940년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다. 이때 드골은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싸웠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프랑스 수도인 파리가 탈환되면서 나치의 지배가 종식됐다. 4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프랑스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 장군은 대통령 취임 후 나치 하에서 부역한 자들을 체포하라는 훈령을 내린다.

가장 혹독한 처벌을 받은 이들은 언론사와 기자들이었다. 나치 하에서 15일 이상 신문을 발행한 언론사는 모두 부역으로 인정해 발행을 금지했고 그 재산은 국유화했다. 프랑스 국민이면서 나치의 군인이나 공무원으로 복무한 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체포된 이들이 약 100만여 명. 이중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10만 여명을 넘었고 그중 6763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나치 부역자에 대한 프랑스의 처벌은 끝이 없다. 공소시효도 없다. 나치 부역 사실이 드러나면 언제든 처벌하고 있다. 그러자 프랑스 일부에서 너무 과하다는 반발이 일었다. 그때 드골이 나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부역자 처벌을 통해,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또다시 프랑스를 배신하는 국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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