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만난 이웃> 서광선 전 세계YMCA 회장

공산군의 총에 죽은 아버지, 복수 결심했던 청년 서광선
평화를 꿈꾸는 노인이 되다

 

오랫동안 이화여대에서 후학을 가르친 서광선 목사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학자다. 세계 YMCA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양신문] 3·1운동 100주년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개개인의 일상 속 시간감각을 훌쩍 뛰어넘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이 겪어온 지난 100년의 시간은 마디마디 너무도 숨가쁜 역사의 국면이 전개됐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남과 북의 분단, 동족끼리의 전쟁, 그리고 국가재건과 산업화,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그리고 종전 66년만에 화해의 훈풍이 불고 있다.
고양신문이 3월에 만난 이웃은 1996년부터 후곡마을에서 살고 있는 고양의 이웃인 서광선 목사다. 1931년 생, 우리 나이로 89세지만 여전히 몸도 마음도 정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맑고 따뜻한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 나무가 한해 한해의 기후를 나이테 속에 새겨 넣었듯, 서광선 목사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들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남과 북, 만주와 미국을 넘나들며

그는 오랫동안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서광선 목사는 학계와 종교계, 사회활동을 넘나들며 국내외에서 폭넓은 족적을 남긴 원로 학자다. 1970년대 이후 사회참여적 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박정희 유신정권과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다 대학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겪기도 했고, 세계 YMCA 회장을 비롯해 수많은 단체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해왔다.

하지만 서광선 목사의 후반기 인생보다 더 흥미로운 건 마흔 살 이전까지 전반기 생애의 궤적이다. 시대의 격변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이주와 유랑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2면에 게재한 ‘서광선 목사의 인생 여정’ 지도는 고스란히 한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시간의 축약도다.

우선 공간적 이동경로를 따라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88년 전,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 평안북도(현재의 행정구역은 자강도) 강계에서 가난한 시골마을 전도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 서광선은 압록강변 국경도시 만포에서 잠시 살다가, 만주 서부지역 공업도시 본계호로 이사를 해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은 소년 서광선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고향 강계로 돌아왔다가, 평양에서 6·25 전쟁을 맞는다.

평양에서 아버지를 잃고 동생과 헤어진 열아홉 청년 서광선은 피난행렬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귀국 후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하며 인생의 후반기를 보낸다. 실로 국경의 끝과 끝은 물론, 남과 북의 중심도시 평양과 서울, 그리고 한반도를 넘어 드넓은 만주벌판과 미 대륙의 여러 지역을 넘나드는 파노라마적 이동 궤적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폭력이 남긴 마음의 상처

서 목사가 각각의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정체성이 변모해 온 과정 역시 거시적 역사가 한 인간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모습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소년 서광선은 학교에서는 일제의 황국신민 교육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목사 아버지에게 근본주의 신앙과 민족의식을 교육받으며 자란다. 해방은 그에게 짧은 기쁨을 선사했지만, 곧이어 공산치하가 된 북녘 땅에서 목사 집안인 그의 가족은 또 다른 탄압을 받게 된다. 6·25 전쟁 중 아버지가 공산군의 총에 죽자 청년 서광선은 분노로 가득 찬다.

이후 피난지 부산에서 군 통신병 시험에 합격해 입대를 하고, 기회와 동경의 땅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기독교와 반공, 숭미가 한 몸뚱이로 작동하는 정체성을 내면화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러한 성향은 북한 서북지역 출신 실향민 다수가 품는 강렬한 내면의 정초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반공과 친미 기독교에 기반한 보수 우익 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서광선 목사는 이러한 편향된 이념의 족쇄에 자신의 나머지 삶을 마저 내 주지 않았다.

신학 공부하며 이념의 굴레 벗다

서광선 목사는 유학 기간 중 다양한 철학과 현대신학을 접하고, 비로소 세상을 규정짓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증오와 분노를 넘어서는 평화의 염원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험악한 공산정권의 폭력을 경험했고 아버지로부터 가장 완고한 보수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은 청년의 내면에 소리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해 그는 자신의 삶과 근현대 한국 기독교 정치사를 아우른 책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한울아카데미 刊)를 세상에 선보였다. 책 서문에서 그는 “한 많은 분단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이 무서운 질문에 대한 우리 교회의 대답이며 나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열아홉 청년시절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하며 독기처럼 품었던 “아버지 원수를 꼭 갚겠다”는 결심을 평생 화두처럼 붙들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뭘까. “진짜 원수를 갚는 길은 결국 세상의 모든 미움이 녹아지도록 사랑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말하는 서광선 목사의 눈빛이 한없이 평화롭다.

아흔을 바라보는 서광선 목사는 최근 오랫동안 소망했던 평화의 꿈이 선물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마음이 설렌다고 말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또 만난답니다. 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지요. 눈을 감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평양에 찾아가 70년 만에 성묘도 하고, 북한의 교인들 손을 잡고 예배도 드리고 싶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을 남과 북이 함께 꿈꾸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 아니겠어요?”

 

올해 89세인 서광선 목사는 시종 남다른 기억력과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역사의 고비마다 뜻밖의 기회가 나를 살게 했다


<인터뷰> 민주화 통일운도에 평생 헌신한 서광선 목사


일제시대,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전도사의 아들로 자랐다. 소학교 시절 기억을 들려달라.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펼치며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절이라 학교에서는 무척 엄혹한 황국신민화 교육을 했다.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내면까지 온전한 일본인이 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성경 속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이야기를 들으며 일제는 언젠가 망하고, 조선 해방의 날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다졌다. 물론 그 때 우리 가족이 상상한 해방은 ‘천사의 나라’ 미국이 가져다주는 해방이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한글 성경과 조선 작가들의 소설, 영어공부 등을 익히기도 했다.

가족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심양 근처로 이사했다.

만주라고 해서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고향에서 농토를 잃고 떠나온 유랑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만주 괴뢰정부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수탈은 여전했고, 하루아침에 3등 국민으로 전락한 중국인들의 분노는 오히려 조선 사람들을 향했다.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교회에 모여 숨죽인 채 항일의지를 서로 독려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해방을 맞았다. 아이들을 다 모아놓고 천황의 항복 소식을 라디오로 듣는데, 일본인 선생이 통곡을 하자 아이들이 덩달아 훌쩍이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집으로 달려오니, 감격에 찬 아버지가 어서 짐을 챙겨 조선 땅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우리 가족들은 일본땅에 떨어진 원자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시 압록강변 강계로 돌아갔다. 북에서의 삶은 어땠나.

압록강을 넘어 평양과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가는 기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야 한다며 평양역에서 내리라고 했다. 3.8선 북쪽은 소련군과 공산당이 장악하던 때였기에, 목사 가족으로서는 운명을 가른 선택이 되고 말았다. 해방이 됐지만, 북쪽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엄혹한 시절이 닥쳤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버텨낸 북쪽 기독교인들의 근성도 만만찮았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는 반공집회를 방불케 하는 설교와 예배가 반복됐다. 그러니 김일성의 눈에 교회가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었고, 얼마 안 가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됐다. 인민재판과 즉결처분의 흉흉한 소식이 난무했다.
지금 돌아보면 기독교가 강했던 북쪽과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던 남쪽 모두 정반대의 정권이 들어서며 결과적으로 너무도 많은 희생과 피를 흘리고 말았다. 당시 남쪽 민중들 사이에서는 김일성이, 북한에서는 이승만이 더 인기가 많았다. 이건 어떤 사상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세를 앞세운 지배자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자신들이 갖지 못한 지도자에 대한 선망으로 표출된 게 아닐까.

6.25 전쟁에서 동생과 헤어지고 아버지를 잃었다.

신체검사에서 운 좋게도 불합격 판정을 받고 나오다가 동생과 마주쳤다. 그 때 나는 20살, 동생은 16살에 불과했다. “잘됐네, 형은 군대 가지 말아야지”라고 말했던 게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후 70년이 지나도록 동생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아버지도 어느 날 공산군에 끌려가더니 돌아오지 않으셨다. 국군과 미군에 의해 평양이 탈환된 후, 대동강변에서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줄에 묶여 총을 맞고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교회 뒷산에 아버지를 묻으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원수를 꼭 갚으리라는 결심을 곱씹으며, 피난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화물칸 지붕에 피난민들이 빼곡하게 매달려 오는데, 힘 없는 노인과 아이들이 기차에서 떨어져 죽는 참상을 목도해야 했다. 도대체 나는 살아 무얼 하려고 이 기차 지붕에 앉아 있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건물 옥상에 올라서자 서 목사는 먼 발치를 바라보며 "저 산이 개성 어디쯤인가 보네"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는 남과 북의 길이 열리면 평양으로 달려가 70년만에 아버지의 무덤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부산 피난시절 군에 입대해 진해에서 군생활을 했다.

살 길을 찾기 위해 해군통신병시험에 응시했는데, 운 좋게도 합격을 했다. 심지어 잠시 미 해군에 가 교육을 받을 기회도 주어졌다. 그 기간에 만난 미군 친구가 또 한 번 내 삶의 기적을 선물해줬다. 자신의 고향 근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초청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철학을, 이어 신학을 공부하며 넓은 세상에 눈을 떴다. 하지만 이 시기 나는 여전히 치열한 진통을 겪고 있는 조국의 역사와 정치상황에 무관심한 방관자였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 친구가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줬다.

미국에서 폭넓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철학공부를 하며 비로소 학문의 깊고 광활한 세계에 눈을 떴다. 이어 정통 보수신학을 하지 않고,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을 접한 것도 큰 행운이었다. 라인홀트 니버, 폴 틸리히 같은 행동주의 신학의 석학들이 스승이었다. 그동안의 원리주의적 신앙을 벗고, 역사와 이성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사회변혁에 참여하는 신앙관을 갖게 됐다. 마침 미국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자유주의 물결도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젊은 정치인 케네디가 몰고 온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에 이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종차별 반대운동과 월남전 반대의 물결 등을 경험하며 자유와 정의,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내면 깊이 새겼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대표적 진보인사 중 한 명이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짓밟고 있었다.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과 공부도 하고, 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시국선언 등을 이어갔다. 각 대학마다 문제교수 명단이 작성돼 총장에게 해직 압력이 들어왔는데, 나는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버팀목이 돼 줘 해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5.18이 터지고 유신 정권보다 더 지독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어김없이 운동권 교수로 찍혀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20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신군부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빨갱이로 만들려고 했지만, 평양에서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한 순교자의 자녀라는 신분 덕분에 빨갱이 누명은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직은 면치 못했고, 4년 동안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공산군에 저항하다 죽었는데, 아들은 반공 우익의 편에 서지 않았다.

독재적 권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한다는 점에서는 북한의 공산정권이나 남한의 독재정권이나 마찬가지의 사회악 아닌가. 나는 내가 견지해 온 남한에서의 기독교 민주화 운동이 아버지의 저항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우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과 숭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진보의 가치를 가로막는 모습이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잇는 길이겠는가.

해외에서 북쪽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기도 했다. 에피소드가 있다면.

남과 북 기독교 대표가 함께하는 국제 모임에 참석했는데, 북측 수석대표가 어릴 적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친 김일성 정권 기독교단체 대표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자신의 연설을 영어로 통역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국가보안법이 시퍼렇던 시절, 잘못하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안기부로 끌려갈 수도 있는 위험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들려오는 “원수는 사랑하는 거야”라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용기를 내 통역을 하고 나니 장내에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 경험은 나에게 굉장한 자유와 해방감을 줬다. 수십 년간 붙들어 온 ‘원수 갚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했다.
 

송광사 암자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한 서광선 목사(1980년 모습). <사진제공=서광선>


88년부터는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관심을 전환했다.

사회참여의 우선순위를 ‘선 민주, 후 통일’이라고 여겨왔는데, 오랜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통일이 안 되면 온전한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진보적 그룹들이 함께 선 평화·통일을 명시한 ‘88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남과 북이 군비를 축소하고, 한반도를 비핵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는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을 하기 훨씬 이전인데도, 미소 양 강대국과 남과 북을 향해 ‘비핵화’라는 과제를 선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그때의 바람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실현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서광선의 정치신학여정’이라는 부제를 붙인 책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를 출간했다. 자신의 삶을 책으로 갈무리한 소감이 남다를 듯하다.

돌아보면 참 놀랍기만 하다. 내 삶에서 내 의도나 힘으로 된 게 거의 없다. 인민군 의사는 어디 아픈데도 없는 나를 왜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시켰던 걸까, 미국에서 잠시 만난 친구는 어째서 내게 미국유학을 권유했던 걸까, 지금도 의문이다. 결국 덤으로 주어진 목숨이 뜻밖에 찾아온 기회를 만나 이 나이까지 나를 살게 했다. 내 삶 자체가 누군가의 사랑의 선물인 셈이다. 민주화운동도 평화통일 운동도 그 빚을 갚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일 뿐이다.

은 소망이 있다면.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 지난해 지인들을 초청해 출간기념회를 겸한 미수잔치(88세 생일잔치)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오늘은 미리 하는 내 장례식’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죽어서 눈 감으면 누가 왔는지 보지도 못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할 수 없으니 지금 여러분들에게 그 인사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미수잔치에 다녀간 지인이 자기 아내에게 “오늘 서광선 목사 장례식 다녀왔으니 나중에 서 목사 죽으면 안 가도 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서광선 목사(1989년). <사진제공=서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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