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포럼

고양신문·아람누리도서관·시민의모임 공동주최

신용하 박영신 교수 강연
역사적 사회적 지역적 가치
고루 새겨본 뜻깊은 자리

 


[고양신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의미와 고양에서 펼쳐진 3·1운동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자리가 열렸다. 27일 아람누리도서관 강의실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3·1운동, 100년의 꿈을 다시 새긴다’는 주제로 진행된 고양 3·1운동 100주년 기념 포럼은 고양신문과 고양시도서관센터가 함께 준비한 행사로, 대한민국 역사학, 사회학계의 대학자인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가 연이어 강의를 펼쳐 커다란 관심을 집중시켰다.

강연에 앞서 이영아 고양신문 대표는 “두 분 대학자를 모시고 3·1운동 정신을 분명히 조명해보고, 그 정신이 고양지역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지역신문기자와 향토역사학자의 발표를 통해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면서 “3·1운동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삼는 길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행사 의의를 밝혔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독립선언서’의 문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3·1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이룬 자주독립, 민주주의, 대동단결, 비폭력, 세계평화주의를 명쾌하게 되새겼다. 또한 이러한 정신이 민족사와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강조하며 “3·1운동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었고, 이러한 성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진 강의에서 박영신 교수는 3·1운동을 펼친 이들이 만들고자 했던 ‘민주공화국’의 꿈이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 꿈을 오늘날의 우리가 온전히 실현하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성찰했다. 특히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민족은 자유를 얻었지만, 민주적 지도자를 세우지 못해 오늘날 우리는 경제제일주의와 유사가족주의라는 새로운 굴레에 스스로 예속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을 청중들에게 던졌다.

2부는 고양신문 유경종 기자가 고양땅에서 전개된 3·1운동의 흔적들을 살핀 후, 최경순 향토역사학자가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지사인 양곡 이가순 선생과 동암 장효근 선생의 삶과 업적으로 조명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포럼에 참석한 이재준 고양시장이 강연 시작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포럼에는 이재준 고양시장을 비롯해 윤용석·조현숙 고양시의원, 유경옥 고양시도서관센터장이 참석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고양평화누리, 통일을이루는사람들, 고양시민회,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등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가해 높은 관심을 보이며 강의를 경청했다. 이재준 시장은 참가자들에게 “3·1운동 정신과 역사를 발굴·계승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과제”라며 “매 해가 100주년이라는 생각으로 이 일을 함께 추진해나가자”고 부탁했다.

포럼이 열린 장소에서는 행사를 함께 준비한 ‘시민의 모임’ 회원들이 3·1운동을 기리는 ‘기억과 소망의 나무’ 메시지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 참석자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3·1운동의 의의를 새롭게 새기는 감명 깊은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행사를 함께 준비한 시민의 모임 회원들이 진행한 '기억과 소망의 나무' 메시지 이벤트. 시민의 모임은 함께 책을 읽으며 '시민 다움'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독서모임으로, 박영신 교수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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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요약>

세계혁명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비폭력 혁명운동’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3‧1독립운동의 사상과 세계사적 위상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 독립만세운동의 규모를 확인해 보자. 백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년)에 수록된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4월 1524회의 집회에 총 202만30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우리 인구는 약 1700만명이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인구(남북한 합산)가 7500만명이니 현재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약 1000만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만세시위였다.

박은식 선생의 통계는 임시정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편찬위원장을 맡아서 자료를 취합한 상당히 정확한 통계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집계한 참가자 수는 100만명인데, 백암 선생의 통계치와 비교해 절반 수준에 그친다. 이는 일본 경찰이 보고한 수를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지역의 경우 시위 규모를 줄여서 보고한 곳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호남지역으로 작은 시위들은 경찰국장이 대부분 누락해 보고했다.

자주독립 넘어 세계평화 염원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의 정신과 사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주독립’ 사상에 있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자유해방과 자주독립을 염원하고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민주주의’ 사상도 내재돼 있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수립하되, 향후 국왕이 아니라 대통령이 지휘하는 민주공화제를 기획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만세운동의 ‘대중화’를 방침으로 세워 평범한 국민이 주체가 될 것을 결정했던 것에서도 이와 같은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비폭력주의’와 ‘세계평화주의’ 사상도 3‧1운동 정신의 핵심이다. 독립선언서에는 비폭력주의가 방법론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와 함께 사상의 측면에서도 선언되고 있다. 또한 독립선언서에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란 표현이 나온다. 동양평화를 넘어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겠다는 3‧1운동의 사상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3‧1운동 이후 민족 역량 비약

이 같은 사상과 정신으로 전국에서 전민족이 대동단결해 봉기한 3‧1운동은 민족사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민족운동이었다.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는 매우 잔혹했다.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이 행복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을 하면서, 실상은 동화정책이란 이름으로 지구상에서 한민족을 말살해 일본의 하층민으로 만들기 위한 잔혹한 통치를 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3‧1운동을 통해 전세계에 독립의지를 널리 알려서 우리 민족을 재인식케 했다.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역량을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비교해 보면, 독립운동 역량이 3‧1운동 이후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비약을 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무엇보다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 그 아들로서 탄생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모든 종류의 군주제를 부정하고 새로이 ‘입헌민주공화정체’로 수립됨으로써 한민족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독립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국경지방에서의 국내 진입까지도 가능하게 됐으며, 이와 함께 민족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민족보존운동’, ‘민족문화운동’, ‘민족실력양성운동’ 등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 외에도 3‧1운동은 국내에서 새롭게 대두되던 청년운동, 농민‧노동‧어린이‧여성운동 등 사회운동의 전기를 열어주었다.

전세계 약소국 독립운동의 계기

3‧1운동은 민족사적 의의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그 교훈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종전(1918년) 직후 승전제국주의 지배하의 약소국들이 적극적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를 열어주었다. 또한 당시 국제사회에서 민중이 맨손으로 독립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전까지의 혁명은 무기와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비폭력 혁명운동은 아직 세계혁명사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였다. 또한 맨손으로 3‧1운동은 국제사회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과 범례를 실증해 보여주었으며, 같은 해 있었던 중국의 5‧4운동 봉기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뿐 아니라 인도에서는 한국의 독립만세운동에 고취되고 그 영향으로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이 급속히 고조되었다.

3‧1운동의 영향은 당시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필리핀, 이집트에까지 파급되어 승전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불타오르게 했다. 지금의 세계사는 대부분 강대국 중심으로 기록됐다. 앞으로의 세계사는 약소민족을 비롯해 전 인류가 모두 포함된 객관적 세계사가 새로 쓰여야 할 것이다. 그 때에는 3‧1운동이 세계대전 종전 직후 열강에 대한 해방운동의 첫 봉화로 더욱 높이 재평가될 것이다.                                          

(정리 = 이성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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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요약>

기미년 겨레 운동 생각,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100년 전 그날, 3·1운동은 탑골공원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지역과 경계를 넘어 온 강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맨 손으로 만세를 부르고, 맨 주먹으로 독립을 외쳤는데도, 왜인은 칼질과 총질을 하며 무도한 학살을 벌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처음의 뜻 그대로 줄기차게 비폭력 평화 정신을 지키고자 했다.

젊은 시절 해외에서 공부할 때 “당신의 나라는 인류를 위해 어떤 공헌을 했나?”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나는 “3·1운동이라는 비폭력 평화운동의 본보기를 보여줬다”고 대답한 바 있다. 기미년 독립운동은 갑작스런 일도, 난데없는 무리가 부린 광기도 아니었다. 바깥 나라의 간섭과 침탈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한 저항정신에서 시작된 당연한 역사의 이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역할

1905년 을사늑약 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하지만 충천하는 의분심만으로 일어난 의병은 실패하고 말았다. 의병운동과 다른 방식으로 왜인에 맞서고자 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나라를 구하려면 힘을 기르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정신에 힘입어 이승훈의 오산학교, 남궁억의 현산학교와 같은 여러 교육단체와 학교가 이곳저곳에서 문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앞서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놓아 우리 겨레도 이에 고무됐고, 일본에서 ‘2·8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나라 안에서도 두루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뜻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천도교와 기독교가 힘을 합쳐 3·1운동 거사계획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10년대 이 땅에서 가장 뚜렷한 겨레운동세력은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따른 기독교와 천도교 두 단체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을 16명, 천도교인을 15명 선임한 것은 이를 잘 반영한 결과다.

선조들이 꿈꾸었던 민주공화국

선조들은 왜인들이 유순한 통치와 고급 교육을 제공했다면 ‘온순한 왜인의 종’으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인이 나라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빼앗긴 나라 사람은 종의 자리에 놓였다’는 근본적 문제, 이 견딜 수 없는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3·1운동은 조선왕국의 복권을 겨냥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조는 백성에게 신임을 잃었기에 새로운 나라는 단연코 왕정이 아닌 다른 정체여야 했고, 임시정부는 바로 이런 겨레의 바람을 표상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민주 공화제’다. 이제 겨레 모두는 왕에게 복종하는 ‘신민’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자주민’을 꿈꾸었다.

참된 민주주의 내면화 실패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뽑혔다. 그는 나라의 공식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정착시키고자 한 첫 지도자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배반한 ‘실패한 독재자’가 됐다.

이승만에 이어 또 다른 독재자가 들어섰다. 일제 하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짓밟아버렸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미처 내면화하지 못한 국민은 이에 장단을 맞춰 그의 독재체제와 한패가 됐다. 생업종사가 국민 된 도리가 됐고, 국민은 체제의 조력자로 전락했다. 권력의 횡포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 민주화도 이뤘지만, 역사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참된 민주주의의 덕목을 온전히 세우지 못했다.

경제우선주의와 유사가족주의 벗어나야

민주공화국은 이에 어울리는 도덕을 요청한다. 과거의 도덕은 관헌의 ‘노예’처럼 살도록 짜놓은 ‘왕조의 도덕’이었다. 충효를 다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백성의 도덕, 시민 도덕으로 탈바꿈돼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공공도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집요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벗어나며 자유를 성취했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두 개의 적이 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 이후 내면화한 ‘경제우선주의’다. 모든 것을 경제의 잣대로 가치를 매기는 경제 우선주의는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공공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유사가족주의다. 제사를 중시하고, 친족과 동향, 선후배를 따지는 가치관이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사로잡고 있다. 다수가 따르는 가치는 절대적일 수 없다. 오히려 견제의 대상이 돼야 한다.

지난 역사를 새기는 오늘, 우리 모두는 100년 전 만세소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물음 앞에 서 있다. 권력의 횡포와 부패에 저항하는 대열에 우리는 동참하고 있나? 비굴하게 살고 있지는 않나? 우리는 어떤 국민이며 나는 어떤 시민인가?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한다.

(정리=유경종 기자)

 

고양의 독립운동가 양곡 이가순과 동암 장효근의 삶에 대한 강연을 한 최경순 향토역사학자.

 

고양땅에서 펼쳐진 3.1운동 이야기를 소개한 유경종 고양신문 기자.

 

시민들이 작성한 메시지로 장식된 기억과 소망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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