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꽃할머니』

[고양신문]  1940년, 그 아이는 열세 살이었다. 배가 고파 언니와 함께 나물을 캐다 영문도 모른 채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일본제국주의 국가가 열세 살 소녀에게 저지른 반복되는 성폭력. 아이는 정신을 놓았고,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소녀들을 전쟁터에 버려두고 떠났다. 누군가 아이를 이 땅으로 데려오고 다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 20년. 이 소녀는 1937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까지 최대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 국가의 승인 아래 이뤄진 제도적 성폭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한 명이다.  (한겨레신문 ‘고통 품어 안고 평화 피운 ‘꽃할머니’ 2010년 6월 11일자 보도 인용)

 

『꽃할머니』 (권윤덕, 사계절)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를 모델로 한 그림책 『꽃할머니』(권윤덕, 사계절)은 한·중·일 세 나라 그림책 작가들이 공동 기획하고 함께 만드는 ‘한·중·일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첫 권이었다. 3국에서 공동 출판하기로 했지만, 이 책은 당시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여러 압박에 시달리던 일본 출판사가 출간을 포기한 것. 그 뒤 2018년에 이르러서야 다른 출판사에서 펀딩을 통해 기금을 모아 이 책을 일본에 출간했다. 하지만 그 사이, 심달연 할머니는 일본 출판본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리고 지난 달 28일, 우리는 또 한 명의 할머니를 보내야했다. 김복동 할머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한편,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 기금’을 조성해 아픔을 겪거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성을 보였던 할머니를 잃은 슬픔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생전에 “우리 살아있을 때에 일본정부가 해결 안 한다. 저거들 하는 걸 봐라. 그래도 우짜겠노. 시작했으니 끝까지 해봐야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는 김복동 할머니는 결국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현재,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스물세 분. 다들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할머니들이 살아생전 진정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무슨 데자뷰 같다.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쓰는 말이다. 아마 읽는 사람도 그런 걸 느낄 거다. 이렇게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안타까워하는 것도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심한 듯 지나는 오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몇 해 전 도서관에서 초등학생들과 『꽃할머니』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한 장 한 장에 담긴 뜻을 살피며 질문하고 토론했다. 그러다가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 나이잖아. 열세 살이면!” 자기 또래 어린 소녀들 이야기라는 사실에 아이들은 분개했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을 수 있어요? 되돌릴 수는 없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물었다. 아이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시위가 있다는 정보를 찾아내고 가보자고 했다. 보호자로 같이 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 주 수요일에 일본대사관 앞을 찾았다. 마침 고등학생들이 주관하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21년째 이렇게 수요일에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군가 20년이 넘게 이렇게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라 그렇게 오랫동안 시위를 했는데도 사과를 못 받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고 말했다.

아이들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놀랐다. ‘그러게, 어느 사이 그냥 늘 하는 집회처럼 생각하고만 있던 건 아닌가?’ 습관처럼.

그리고도 시간이 또 많이 흘러 그 아이들은 이제 19살. 내년이면 성인이 된다. 그 시간 동안 여전히 일본은 사과를 하지 않았고, 할머니들은 한 분씩 이 땅을 떠나가고 있다. 언론에서 할머니들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또 분개하고 또 금방 잊어왔다. 습관처럼.

『꽃할머니』 그림책을 다시 펼쳐본다. 한 장면, 한 장면 꽃이 피어있다. 끌려가는 장면에도, 일본군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장면에서도 꽃들이 가득하다. 따뜻한 봄이 오면 여기저기 피어 세상

박미숙 (책과 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을 아름답게 하는 꽃들, 꽃들은 한 잎 한 잎 떨어져 흩어져 있어도 그 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할머니들은 그 꽃의 한 잎이 아니었을까?

다시 봄이 온다. 올해 봄에도 꽃이 필 거다. 올해 피는 꽃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 한 잎 한 잎이 다 지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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