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전국의 하늘이 미세먼지로 뿌옇다. 정부에서는 바깥외출을 자제하고, 외출시에는 마스크를 쓰라고 긴급문자를 날렸다. 혹자는 자조적으로 ‘화성 체험’을 하고 있다 말하고, 어떤 이는 중국발 미세먼지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며 약소국의 서러움을 민족주의적 감정에 실어 푸념했다. 학부모들은 공기청정기도 없는 학교에 아이를 등교시킨 후 한숨을 지었고. 한 야당은 현 정부의 탈핵화 정책이 현재의 결과를 초래했다면 다시 원전사업을 정상화하자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미세먼지는 문명의 산물이다. 현대 문명의 원천인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했지만, 그 편의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농업혁명은 사기였다고 일갈한 유발 하라리의 어조를 빌리자면, 과학혁명은 사기였다. 과학혁명을 무기로 성장한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한 미세먼지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애시당초 봉쇄되어 있다. 자본의 꿈은 무한 증식에 있으며, 그 무한 증식을 위해서는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을 갈아서라도 성장하고 말겠다는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날에 특히 부각되고 있는 부의 집중, 소득 격차, 환경 파괴, 자살률 증가, 대량 실업 사태는 자본증식과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사회적 병폐다. 무한 생산은 무한 소비를 요청하고, 무한 소비는 무한 경쟁과 무한 쓰레기 생산으로 귀결된다. 흙수저층과 미세먼지의 대량생산은 자명하다.

그 무한성장의 욕망을 접지 않은 채 미세먼지의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은, 밥은 먹고 똥은 싸지 않겠다는 말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미세먼지를 해결하는 획기적인 기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비용과 그보다 더한 쓰레기들을 생산해야 한다. 그 몫은 온전히 우리에게 부과된다. 미세먼지 없는 전기자동차가 움직이려면 전기를 필요로 하는데,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미세먼지를 생산해야 한다. 핵발전은 먼지 없는 전기를 생산하겠지만 그에 따른 핵폐기물의 생산은 인간의 삶을 무한히 위협할 것이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물을 내리면 우리가 생산한 분뇨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절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화학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집집마다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서 공기청정기를 들여놓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가족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그 위태로움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뼈와 살을 갈아야 한다. 근본 문제는 공기청정기의 유무가 아니라,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하는 삶의 반성이다.

장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만 알려고 하지, 아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것을 아니라고 할 줄 알지, 좋은 것을 아니라고 할 줄 모른다.” 우리는 미세먼지가 우리 욕망의 결과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세먼지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명의 이기만을 누리며 좋아할 때, 미세먼지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제는 좋은 것을 아니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지령(?)이 내려왔다. 금식하고, 소비를 줄이고, 쓰레기를 만들지 말아라! 이런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문명적인 지령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미세먼지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세먼지를 만들고 있는 나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때문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문명과 우리의 삶은 너무도 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구나. 이를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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