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역사특강 ‘정조대왕은 정말 성군일까?’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신간 통해 정조 이중성 날카롭게 지적
조선의 정치와 사회 입체적 분석

 


[고양신문]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양대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정조대왕에 대해 “정조가 과연 성군인지 엄밀하게 되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질문을 던진 이는 베스트셀러 역사저술가 박영규 작가다. 박 작가는 “정조가 노론 영수 심환지와 몰래 주고받은 밀찰 등을 살펴보면, 정조는 치밀한 정치적 술수를 동원해 정적들을 장악한 이중적 인물에 가깝다”는 다소 파격적 견해를 밝혔다.

지난 4일 한양문고에서 열린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강사로 초청된 박영규 작가는 신간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의 내용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정조 다시보기’를 주문했다.

박영규 작가는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발표하며 출판계에 대중역사서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후 그의 작업은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이어지며 ‘한 권으로 읽는…’으로 시작하는 명품 스테디셀러들을 탄생시켰다. 이어 기행 시리즈 『조선관청기행』·『조선명저기행』 , 실록 시리즈 『조선전쟁실록』·『조선붕당실록』 등을 발표하며 ‘주제로 읽는 조선사’ 저술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창작세계는 역사저술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한 박 작가는 『책략』(전5권)과 장편 『그 남자의 물고기』 등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또한 동·서양의 철학사조와 사상가들을 연구해 『생각의 정복자들』, 『달마에서 성철까지』, 『도덕경 읽는 즐거움』, 『생각 박물관』과 같은 독창적 인문서를 출간하는 등, 인문학 3대 분야인 문·사·철을 넘나드는 경이로운 창작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새롭게 선보인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은 ‘새로 쓰는 삼각인물전’ 제1권이다. 박 작가는 “한 시대를 주도한 세 명의 인물을 축으로 조선의 정치·사회·문화상을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려 한다”며 시리즈 기획의도를 밝혔다. 한양문고에서의 강의는 새로운 시리즈 첫 권을 상재한 후 독자들과의 첫 만남인 셈이다. 강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박영규 작가의 신간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은 ‘새로 쓰는 삼각인물전’ 시리즈 제1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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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세자의 아들 정조

성군의 대명사는 중국역사의 시조 요·순 임금이다. 그들의 치적에서 보듯 성군은 우선 외적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고, 치수를 잘 해 백성들을 살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선을 따르고 악을 싫어해 주변에 인격이 잘 드러나야 비로소 성군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정조는 과연 성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릴까? 우선 정조의 성장과정을 살펴보자. 정조는 편집증적 할아버지(영조)와 미치광이 아버지(사도세자) 아래서 자랐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신분 콤플렉스를 지녔던 영조는 세자를 가혹하게 다뤘다. 아버지가 너무 두려웠던 사도세자는 다양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며 주변 환관과 궁녀 100여 명을 죽일 정도로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냈다. 결국 자신과 아들(정조)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웠던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영빈이씨(사도세자의 모)에게 “세자가 죽어야 모두가 산다”고 극단적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정조의 가족사는 이처럼 참혹하고 비극적이다.

정적 제거에 홍국영 이용하고 버려 

이후에도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로 인해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된 이들을 차례로 쳐 낸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기 위해 홍국영이라는 야망 가득한 젊은 신하를 내세워 수년간 전권을 휘두르게 한다. 홍국영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해 3년 반 동안 기득권 노론세력의 팔다리를 다 자르는 악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정적 제거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자, 정조는 홍국영을 변방으로 내려 보낸다. 그곳에서 젊은 홍국영은 이유 없이 갑자기 죽는다. 정조가 그를 제거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홍국영의 등용과 퇴출 과정에서 정조의 이중적이고 냉혹한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조의 치밀한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당파의 역학구도다. 정조는 전통적 기득권 세력인 노론 외에도 소론과 남인을 함께 등용해 3당제가 유지되도록 했다. 하지만 소론은 언제나 노론보다 적게, 남인은 언제나 소론보다 적게 세력을 제한했다. 그래서 사안에 따라 3당이 이합집산하면서 어느 당파도 스스로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구도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정조가 채제공과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남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상은 정조가 당파를 조정할 수 있을 만큼만 키우는 데 그쳤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인은 정조가 언제든 품 안에서 뽑아들 수 있는 비수였고,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그 비수의 손잡이였던 것이다.

‘밀찰 정치’로 국정 마음대로 장악

정조의 이중적 면모를 가장 잘 방증하는 사료는 바로 밀찰(비밀편지)이다. 실록에 드러난 행적과 달리, 정조는 수많은 비밀편지를 통해 3당의 영수들을 뒤에서 조정하는 ‘밀찰 정치’의 달인이었다. 임금과 비공식적 비밀을 만든다는 건 그만큼 위험이 동반되는 일이기에, 밀찰은 3당 영수들에게 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노론 영수 심환지가 자신이 정조로부터 받은 편지 250통을 정조 몰래 고스란히 집안 후손들에게 남긴 덕분에 밝혀질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국정 하나하나부터 신하들에 대한 평가 등을 밀찰이라는 비공식적 방법을 사용해 정조가 마음대로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정조는 양란 이후 침체된 조선의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걸출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공노비를 해방하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하고,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학자를 등용해 화성을 축조하기도 했다. 실력 있는 서얼 출신 학자들에게 기회를 열어 준 것도 정조였다. 하지만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은, 정조의 업적은 성군정치에 가깝지만 그걸 실현하는 방식은 독재정치였다는 점이다.
 

한양문고 강의실을 가득 채운 청중들이 박영규 작가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정조 다시보기’ 시작해야

사람들은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아 개혁을 완성했다면 조선이 쉽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조 시대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조 때문에 조선이 무너진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정조의 이중적 독재는 당파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고, 정조가 죽자 조선은 정치 시스템이 부재된 상태에서 외척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 근사한 집을 지었지만, 정작 바위가 붕괴되며 그 위의 집도 무너져 내린 꼴이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역사의 인물은 후대에 의해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변변찮은 왕들이 이어지며 그나마 마지막 왕다운 왕이었던 정조가 과도하게 신화화 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좀 더 입체적이고 다면적으로 바라봐야 역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조는 진짜 성군일까?’라는 질문은 모든 역사적 고정관념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은 지역의 기업인 알뜨레노띠(명품 이탈리아 침대 브랜드)와 지역서점 한양문고가 함께 여는 시리즈 강연이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고양에 거주하는 작가·인문학자를 초청해 진행하는데, 4월 1일에는 김동국 작가가 주인공이다. 미학을 전공한 김 작가는 ‘모두를 위한, 아무도 위하지 않는 철학’이라는 주제로 독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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