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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살리고 자립해야 독립한다… 한강물 끌어 황무지 옥토 만든 ‘독립지사 이가순’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5)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9.03.08 21:28
  • 호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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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가열찼던 원산 3·1 만세운동 주도
러시아·중국 넘나들며 독립운동 

만년에 능곡에 정착해 계몽운동 펼치며
행주-장항동까지 이어지는 농수로 건설

아버지 유업, 아들 이원재씨가 마무리
오늘날에도 고양땅 적시며 유유히 흘러

 

독립지사 양곡 이가순 선생.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는 누가 있을까.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양곡 이가순 선생과 동암 장효근 선생을 꼽는다. 두 분의 생애를 2주 동안 각각 소개하고자 한다.

양곡 이가순(陽谷 李可順) 선생의 삶을 연작 그림으로 그린다면 젊은 시절과 중년, 그리고 노년을 각각 다른 색깔로 채색해야 하리라. 그만큼 이주 공간도 광활하고, 활동 영역도 다채롭다. 젊은 시절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펼쳤고, 50대에 원산에서 3ㆍ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다. 이후 원산지역의 민족 지도자로서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에 앞장선다.

그가 고양땅과 인연을 맺은 건 60을 훌쩍 넘긴 노년에 이르러서였지만,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바쳐 너무도 귀한 흔적을 고양땅에 남긴다. 행주산성 양수장에서 한강물을 끌어올려 백석동과 장항동을 지나 송포평야까지 물을 전하는 농수로가 바로 양곡 선생의 작품이다.

‘이가순 수로’라 불리는 이 물길은 독립운동가, 계몽적 선각자, 농지개척자의 모습을 한 생애 속에 품어낸 위대한 인물의 넋을 안고 오늘날까지도 고양땅 구석구석을 적셔주고 있다.

 

노령과 원산을 오가는 독립지사

1867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이가순 선생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개화사상을 깨우쳤다. 왜놈들에게 국권을 야금야금 빼앗기며 명운이 기울어가는 조선의 처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가순은 20대 중반에 아내와 두 아들(원재·형재)을 동생에게 맡기고 러시아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훌쩍 건너간다.

당시 노령지역은 함경도에서 집단 이주한 조선인들이 농지를 개척하며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계몽적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을 근거로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발간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가순 선생 역시 이곳이 국권회복 운동을 펼치기에 적절한 곳으로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노령에서의 구체적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노령지역 권업회를 다룬 신문기사에 노령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등과 함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양곡 선생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최재형 외에도 홍범도, 이상설 등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40대가 되자 이가순 선생은 동해바다가 펼쳐진 함경도 항구도시 원산으로 이주한다. 거점 역할을 한 곳은 바로 교회였다. 일찌감치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가순 선생은 교회를 찾아가 전도사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들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다. 원산을 근거 삼아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들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한 것이다.

원산에서 양곡 선생은 아들 원재와 26년 만에 상봉한다. 동생에게 맡겼던 꼬맹이 아들이 장성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 아들은 고학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당당히 의사가 돼 원산의 한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을 건사하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와 모친의 사망을 겪으며 외롭게 성장한 아들의 눈물겨운 만남을 상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원산 장터에 울려 퍼진 만세소리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에 가장 큰 방점은 역시 원산 3·1만세운동이다. 1919년 2월, 서울에 다녀온 정춘수 목사(원산 남촌동 감리교회)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외치자는 것이다. 오랫동안 벼르던 순간이 비로소 다가왔음을 직감한 이가순 선생은 원산 중리교회 곽명리 전도사 등과 함께 원산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준비한다.

거사 하루 전날, 황급히 서울에 올라갔던 곽명리가 독립선언서 300장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가순은 일찌감치 10명이 넘는 동지들을 비밀리에 진성여학교에 모아놓고 있었다. 교회 장로, 학교 교사, 상인, 고물상 주인 등 신분은 다양했지만, 일제의 압박을 끝장내고 조국독립을 외치자는 비장한 결기만은 하나였다. 구심점은 누가 뭐래도 ‘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가순 선생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또한 후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이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며 독려했다. 동지들은 등사판 3대를 이용해 수천 장의 선언서를 찍고, 손으로 태극기를 그리며 거사 전야를 지새웠다.

3월 1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마침 원산의 장날이었다. 오후 2시, 각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13명의 동지들이 원산 각 지역에서 동시에 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외쳤다. 이가순은 원산시장에서 선언서를 낭독했고, 곽명리는 원산 지방재판소 앞에서 만세를 주도했다. 고물상 주인 오경달은 북과 나팔을 동원하기도 했다. 원산 각처에서 일어난 시위대는 쉼 없이 만세를 부르며 이가순이 지키고 있는 장촌동 장터로 집결했고, 장터를 찾은 이들이 가세해 마침내 거대한 인파를 이뤘다.

깜짝 놀란 순사와 헌병대가 물감 탄 물을 뿌리고, 공포를 쏘며 제지하려 했지만, 함성소리는 늦은 시간까지 멈출 줄 몰랐다. 서울 탑골공원과 원산 장터는 물리적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하나의 열망으로 타올랐다. 양곡 이가순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일제의 주동자 색출작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이가순 선생은 체포된 이들 중 가장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앞두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가순은 옥중 만세를 불러 꺾이지 않는 결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 일로 채찍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일주일 동안 독방살이에 처해지기도 했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별명이 왜 호랑이인지를 당당히 보여줬다.

“너희는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은 자들이고, 나는 빼앗긴 사람이다. 어찌 남의 것을 훔친 자가 빼앗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단 말인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함흥감옥에서 형을 치른다. 그와 함께 원산 만세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함께 수감된 정연수는 그 해 10월 옥에서 사망한다. 심문 과정에서의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장면이다.
 

호수공원에 세워진 양곡 이가순 선생 기념비.


함경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 부각

일제는 3·1만세운동을 총칼을 들고 잔인하게 진압했지만, 옥에서 나온 이가순의 기를 꺾지는 못했다. 원산 대성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재직하며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항일투사의 해외 망명을 돕기도 했다.

1927년,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이 태동했다. 독립운동 양대 세력인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합해 신간회를 조직한 것이다. 신간회는 조선민족의 정치·경제적 해방, 전민족의 공동이익 추구, 기회주의 배격 등의 정강정책을 통해 민족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 발기인 명단을 살펴보면 이상재, 신채호, 안재홍, 신석우, 권동진 등 당대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망라된다. 신간회는 전국 곳곳에 지회를 조직해 세력을 확장했는데, 원산지회를 이끈 인물은 역시 양곡 이가순 선생이었다.

신간회 원산지회는 1931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과 관련한 중재 노력이다. 1928년 원산의 석유회사와 부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발발한 파업은 원산노련 산하단체 1800여 명 노동자들의 연쇄파업으로 이어지며 노동운동 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확산된다. 일제 군경과의 대대적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가순 선생은 원산 신간회 회장 신분으로 원산경찰서장과 원산부윤을 방문해 일본인들의 불법을 성토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선다.

당시 선생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1931년 발행된 『동광』이라는 잡지에 ‘동서고금인물좌담회’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역사학자 문일평을 비롯한 석학들이 국내외 주요 인물들을 평하는 내용이다. 그 중 조선의 각 지역 인물을 논하는 대목을 살펴보면, 토론자들은 함경도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가순 선생을 꼽고 있다. 평안도에서는 조만식, 전라도에선 판소리 명창 송만갑을 거론하고 있어 당시 이가순 선생의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고양땅 농민들과 함께 한 만년

일제강점이 길어지자 이가순 선생은 노구의 몸으로 다시 한 번 활동무대를 옮긴다. 바로 고양땅 능곡이다. 선생은 1930년대 중반 고양군 지도면 삼성당 주변의 황무지를 개척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토당동과 백석동 일대의 땅을 구입해 백석농장을 경영한다.

당시 이 지역은 한강변의 드넓은 평야지대였지만, 홍수와 한 해를 번갈아가며 맞아야 했던 불모지였다. 그나마 1920년대 중반부터 대보둑이라 불리는 한강제방이 건설되며 홍수피해는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과 농경지 사이에 높은 둑이 가로막히며 농사를 지을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용두레와 물지게로 샛강물을 퍼 나르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가순 선생은 행주산성 아래 양수장을 만들어 한강물을 끌어올리고, 그 물을 농수로를 통해 흐르게 하면 드넓은 한강변 불모지를 옥토로 바꿀 수 있다는 기발한 발상을 한다. 농업을 살리고 농민이 자립해야 조국의 독립도 가까워진다는 선각자의 혜안이었다.

1935년, 행주외동 양수장 건설을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됐다. 산을 깎고 돌을 깨 가며 물의 길을 터주는 사업에 48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 대사역이 어찌 재력으로만 가능했겠는가. 선생을 믿고 따른 농민들의 협력, 그리고 그들에게 선명한 목표와 동기를 부여한 이가순 선생의 지도력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이었던 것이다.

넓은 황무지를 바라보면서도 늘 가난했던 농민들은 농한기에 공사에 참여하며 노임소득을 올렸다. 또한 지역의 어르신들은 이가순 선생 집안에서 봄철 영농자금도 대 주며 지역 농민들의 자활을 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은 수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43년 76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주어진 삶의 시간을 하나도 허비하지 않은, 오히려 만년에 이르러 더욱 밀도 높은 실천을 펼쳤던 애국지사의 삶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만년을 고양땅의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하며 민족계몽운동과 더불어 경지 확보, 수리시설 확충, 농업생산성 증대와 같은 경제적 생활향상을 도모했다. 이렇듯 시대의 요구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기개 있게, 또한 유연하게 전개한 점이야말로 선생의 삶이 보여주는 차별화된 위대함이 아닐까.
 

능곡들녘을 지나온 '이가순 수로'가 백석동 섬말다리를 향해 흐르고 있다.


곳곳마다 병원·교회 세운 이원재 선생

선생이 못 다 이룬 사업은 아들 이원재 선생이 계승한다. 지면이 부족해 충분히 다루지 못했지만, 서두에 잠깐 등장한 장남 이원재 선생 역시 양곡 선생 못잖게 조명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아버지가 일찍부터 러시아와 중국, 원산을 오가며 풍운아와 같은 독립지사의 삶을 살았다면, 이원재 선생은 외롭고 고독한 독립지사 아들의 운명을 강인한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하며 자수성가한 뛰어난 실력과 인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가순 선생이 벌인 만년의 수리사업을 너끈히 뒷받침한 것도 이원재 선생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재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이원재 선생은 세브란스 의전에 당당히 입학해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마쳤다. 의사 고시에 합격한 후 결혼을 하는데, 그의 아내 노숙경은 바로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독립지사 노백린 장군의 딸이다.

원산 기독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이원재 선생은 아버지 이가순 선생의 권고를 받아들여 1916년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이원재 선생은 고려병원을 세워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독립지사들을 돕는다.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한반도와 대륙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펼친 이가순 선생과 중국에 망명 중인 노백린 장군의 활동을 긴밀히 연결한 존재가 바로 이원재 선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로서는 아주 귀했던 의료기술을 가진 이원재 선생은 가는 곳마다 병원을 열고, 뛰어난 의술과 헌신적 소명의식으로 병원을 경영해 경제적 안정과 사회활동의 기반을 스스로 일궈냈다. 하얼빈에서의 고려병원, 강릉에서의 관동병원, 그리고 30년대 중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능곡에서의 금강병원이 이원재 선생이 세운 의료시설들이다. 이곳을 기반으로 이원재 선생 부부는 가는 곳마다 모임을 조직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유족들은 증언한다. 강릉에서 생활할 때 이원재 선생 역시 아버지를 따라 신간회 강릉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능곡에서 병원을 경영할 때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의술을 펼쳐 주민들의 큰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미담처럼 전해온다. 이가순 선생은 호랑이 같은 카리스마로, 이원재 선생은 따뜻한 친화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던 것이다.
 

양곡 이가순 선생과 아들 이원재 선생이 함께 한 가족사진.


농수로 완공과 고양수리조합 인가

이원재 선생이 이어받은 농수로 사업은 고비마다 어려운 여건을 돌파하며 우직하게 진행된다. 바위를 만나면 뚫고 지나고, 폭이 넓은 천을 가로지를 때는 물이 지나가는 다리를 놓기도 했다. 이원재 선생의 동생 이형재씨는 물론, 각처에서 이가순·이원재 부자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아예 능곡으로 이주해 사업을 돕기도 했다.

마침내 행주외리 덕양산 아래 양수장에서 퍼올린 한강물은 행주내리를 건너 삼성당을 휘돌고, 백석리 백석농장 앞뜰을 지나 섬말다리를 거쳐 장항리까지 도달하는 15km의 여정을 막힘 없이 흐르게 된다. 완공된 이가순 수로를 통해 땅을 적실 수 있는 농경지만 10여만 평이었다.

수로 조성의 결과는 놀라웠다. 농지와 뻘밭의 경계조차 불분명했던 황무지가 비로소 농경지로 정리돼 안정된 소출을 올릴 수 있게 됐고, 이원재 선생은 지역주민을 대표해 고양수리조합 인가 신청을 한다. 그리고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마침내 고양수리조합 인가를 받고 이원재 선생이 초대 조합장에 추대된다.

이원재·노숙경 부부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흔적은 바로 능곡 삼성당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능곡감리교회다. 이원재 선생의 딸 이인영 선생은 1940년 장남을 잃는 불행을 겪은 부부가 죽은 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토지 300평을 희사해 세웠다고 증언한다.

이원재 선생은 1950년 2월, 64세를 일기로 세상과 이별한다. 고양군민들은 고양군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며 이원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가순·이원재 부자의 노력으로 능곡과 백석, 장항동의 드넓은 벌판은 가뭄과 수해를 입지 않는 옥토로 바뀌었다. 이후 이가순 수로는 대화동과 덕이동을 지나 송포들녘을 가로질러 파주까지 연장되는 행주양수장 1호 용수간선수로로 완성됐다. 고양땅에 풍요를 선사하는 젖줄로서의 역할을 지금껏 변함없이 감당하고 있으니, 민족과 이웃을 사랑한 한 가문이 지역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다채롭게 전개되는 기림 활동

망우리 묘지에 묻혔던 이가순 선생은 1989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이 서훈됐다. 지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이가순 선생의 위상은 그동안 크게 조명 받지 못했다. 해방 후까지 생존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데 반해, 이가순 선생처럼 해방 전 돌아가신 독립지사의 경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남길 기회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자료나 신문기사, 고령이 된 후손들의 증언에 의존해 그의 삶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고양에서 10여 년 전부터 양곡 이가순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고양시씨족협의회는 2009년 양곡 이가순 선생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하고,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 기사 역시 당시 발행한 자료집의 내용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또한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에서 호수공원에 그를 기리는 커다란 빗돌을 세우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기념물로는 1950년 5월에 건립된 이가순 선생 관개송덕비가 있다. 고양시 지정문화재인 송덕비는 덕양산 기슭 한국농어촌공사 행주양수장 입구에 서 있으며 이가순·이원재 부자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적혀 있다. 한강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행주산성 수변공원에 들를 일이 있다면, 이가순 송덕비도 꼭 한번 찾아보자.

이가순 수로에는 농번기에만 물을 흘려보낸다. 기자는 몇 해 전 호수공원을 출발해 이가순 수로를 따라 행주양수장까지 걸어본 적이 있다. 섬말다리를 건너며, 백석동 들녘에서, 그리고 삼성당과 능곡평야를 가로지르며 수로는 시시각각 다채로운 풍광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평소 아파트 밀집지역으로만 인식했던 고양땅이 얼마나 광활하고 아름다운 농경지를 두르고 있는지를 두 눈과 두 다리로 실감할 수 있었다. 곧 다가올 모내기철이 시작되면, 한강에서 길어올린 물길이 수로 가득 힘차게 흘러가는 멋진 모습을 또다시 연출할 것이다. 호랑이 독립지사의 높은 기개도, 의사선생의 넉넉한 인품도 한강물처럼 고양땅 후손들의 마음과 마음을 타고 오래도록 유유히 흐르리라.
 

이원재 선생 부부가 희사한 땅 위에 세워진 능곡감리교회. 토당동 삼성당에 자리하고 있다.

 

1950년 세워진 이가순 선생 관개 송덕비.

 

호수공원 부근의 이가순 수로 모습. 행주양수장에서 끌어올린 한강물로 고양땅 구석구석을 적셔준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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