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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배층 아닌 ‘변방 고양농민의 평화혁명’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7)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9.03.22 20:42
  • 호수 1412
  • 댓글 0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자주·독립·평등·평화세상 꿈꾼
3·1 정신 핏줄처럼 번진 고양
주도세력 없이 농민 스스로 참여
고양 3·1운동의 역사 기록 필요
일제 겪은 어르신들 구술채록 시급

 

일산문화공원에 서 있는 고양독립운동기념탑. 고양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취지는 좋지만 위치와 형상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고양신문] ‘3·1운동 100주년’은 난감한 과제였다. 첫 회에서 밝혔듯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3·1만세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남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기에 배가 어디로 갈지 예측조차 힘들었다. 겨우겨우 6회의 연재를 마치고 마지막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난감함은 마찬가지다. 기자의 지식과 사유로는 감히 고양에서 펼쳐진 3·1운동의 의의와 가치를 논하기에 역부족임을 다시 한 번 자인할 수밖에 없다. 다만 3·1운동의 다양한 기록들을 성급히 들춰보며 느낀 몇몇 생각들을 전하고자 한다. 한 줄의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3·1운동의 수많은 얼굴들과 대면한 기자의 작은 감동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중심이 부재한 다발적 대중봉기
3·1운동 관련 자료를 살피며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중심에서 촉발된 운동이 주변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마치 실핏줄이 퍼지듯 다양한 열망을 포섭하며 예측불허의 경로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무중심성과 다변성, 자발성이야말로 3·1운동의 핵심적 특징으로 읽힌다.
거시적으로 3·1운동은 세계사적 혁명의 물결 속에 자리한다. 1910년대는 가히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혁명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 1916년 아일랜드봉기, 1917년 러시아혁명, 그리고 1918년 독일혁명과 1919년 이집트·헝가리혁명과 중국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인류사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적 격변이 세계를 휩쓸었다.
하지만 3·1운동은 위의 모든 운동들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특징을 품고 있다. ‘중심’ 부재라는 세계 곳곳의 어느 혁명도 3·1운동만큼 자발적·동시적·전국적 봉기양상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민족대표 33인과 탑골공원에서의 학생 대중의 만세를 운동의 촉발점으로 볼 수 있겠으나, 전국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만세시위는 대부분 외부와의 어떤 연결망도 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시위의 시작과 끝을 계획한 조직적 세력이나 무장단체, 또는 지식인들로 구성된 지도부는 3·1운동 내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토피아적 가치의 실현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촉발자들은  시작과 동시에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후 그 ‘선언’에 담긴 독립·자유·자주, 그리고 평화주의와 같은 가치를 밀어붙이는 일은 온전히 대중들의 몫이었다.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부상한, 인류 공영을 지향하는 유토피아적 기대감에 영향을 받았다. 세계대전 기간 중 어마어마한 숫자의 젊은이와 민간인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나갔다. 서구 중심의 합리주의·이성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목도한 인류는 전쟁 종료와 함께 평화·공영과 같은 이상적 가치를 숭앙하기 시작했다. 때 맞춰 발설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전 세계가 그토록 뜨겁게 반응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하지만 서구 열강이 말한 평화와 자결 역시 승전국의 전리품 분배를 위한 말잔치로 귀결되고 말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실제로 대중 전체가 평화·해방·자결로 대변되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해 실제 행동에 나선 사례는 3·1운동이 유일했다. 3·1만세운동에 나선 대중들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았고, 그러므로 누구도 의지하지 않았다. 
인류 보편의 열망을 동아시아 끄트머리 약소 식민지 땅 시골 구석구석에서 실제 행동으로 구현됐다는 점이야말로 3·1운동이 보여주는 경이롭고 차별화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고양땅 전역에서 펼쳐진 3·1만세운동도 바로 그 지점에 자리한다. 

청원을 거부한 선취의 언어 ‘선언’
3·1운동 대중은 ‘우리를 독립시켜 달라’고 일제에 청원하지 않았다. 자치를 부여하고, 차별을 없애달라고 협상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우리는 독립했다!’고 ‘선언’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자에 맞선 약자의 ‘선언’은 일종의 종교적 언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현실을 강렬한 신념을 토대로 미리 당겨쓰는 표현양식이 바로 ‘선언’이기 때문이다. 3·1운동 대중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해야 할 미래를 선취한다는 열망으로 실재와 선언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언’이 가지는 폭발적 힘에 주목할 때, 동포의 죽음을 목도한 이들이 다시 만세의 일렬에 나설 수 있었던 용기를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백인백색 열망 투영한 격문들
3·1운동의 무중심성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다양한 2차 창작물들이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뿌려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서가 원형 그대로 복제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변형되고 요약된 선언서나 격문의 종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읽기 쉬운 언문으로 축소 개작하기도 했고, 각자의 열망과 바람을 정직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대한독립’, 또는 ‘조선독립’이라는 말 아래 누군가는 신분해방을, 누군가는 남녀평등을, 누군가는 대동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므로 독립과 묶인 ‘대한’과 ‘조선’은 결코 경술국치 이전의 대한제국, 또는 이씨 조선이 아닌, 백인백색의 이상이 투영된 인간해방의 세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근대의 탈을 쓴 착취와의 결별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운동이었지만, 동시에 개개인이 자아의 존재 근거를 얻기 위한 인정투쟁이었다. 당연히 도래해야 할 인간 중심의 세상, 그 새로운 세상의 시민권(물론 당시에는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겠지만)을 얻기 위한 대열에 여성으로서, 백정으로서, 노동자로서, 그리고 농민으로서 주체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섰고, 장터의 장꾼들은 쌀가마니에 올라가 격문을 읽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보다 더 결기 있게 시위대의 선봉에 섰고, 농민들은 초가지붕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농촌의 촌로들마저 산에 올라가 밤을 지새며 봉화불을 살랐다.
이들이 저항했던 대상은 구체적으로는 일제였고, 추상적으로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쳐들어와 인간으로서의 삶을 파괴한 일체의 제도와 속박이기도 했다.
강제합병과 동시에 시작한 토지조사가 제도를 앞세운 ‘땅뺏기 놀음’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근대와 합리의 결과는 토지세, 가옥세, 주세, 연초세, 영업세, 인지세의 명목으로 쥐어짜는 민초들의 고혈이었다. 또한 길이 닦이는 곳에서는 도로·철도 부설 부역에 동원돼야 했고, 바닷가에선 간척사업에서 뼛골이 녹아났다.  

스스로 주인 되는 나라 꿈꿔

이렇듯 임계점에 달한 고통의 현실이 1910년과 1919년의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사실 국권을 상실한 1910년에 조선 민중들은 서늘하리만치 얌전했다. 구국 투쟁의 열기가 정미의병 실패 이후로 한풀 꺾인 후 정작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서는 체념에 가까운 적막감만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그랬던 조선 민중이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민족적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낸 배경에는, 가혹한 식민지 9년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박탈의 근거를 일거에 무효화하는 주문, 근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기만과 착취를 단칼에 단절하는 선언이 ‘대한독립만세’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왕조국가의 백성으로, 또한 식민지국가의 노예로 살아오며 한 번도 스스로 주인이 돼 보지 못한 울분을 3·1만세운동에 투영했다. 수탈이 사라진, 토지가 공평히 분배되는, 노동이 보상받는, 신분이 평등한 새로운 나라. 지구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믿음 속에 항상 존재했던 세상을 각자의 마음에서 뜨겁게 건설했고, 스스로 그 나라의 주인이기를 꿈꿨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 지배계층은 무력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물론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 일제의 협력자로 쪼그라든 그들은 도시에서도 향촌에서도 존재감이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양땅에서도 향촌의 유력인사들이 만세운동의 중심으로 나선 예를 찾아볼 수 없다. 3·1운동 국면에서 중심과 주변의 위상은 이렇게 전도된다.

농촌마을에 집중된 희생
희생자의 숫자에서도 중심과 주변의 차이는 선입견을 뒤집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3·1운동을 상상할 때 대도시의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다 총칼에 맞아 희생당하는 이미지를 그리곤 한다. 실제로 3·1운동 기간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수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경성 시내에서 시위 중 희생당한 사람은 단 5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지방 도시에서 희생당했고,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빼앗긴 현장은 농촌과 시골마을에서 였다.
지식인과 양반들이 회의와 고민 뒤편으로 숨어버릴 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만세운동에 매달린 이들은 결국 농민이었으니, 그들에게 폭력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도심에서와 달리 시골 촌부들의 희생은 은폐하기도 쉬웠고, 파급력도 낮았던 까닭도 있었으리라.

이상과 절망 뒤섞인 ‘평화주의’
시위대가 끝까지 관철했던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자. 신분과 지역을 불문하고 3·1운동 참가 대중은 평화주의 원칙을 마지막까지 고수했다. 이는 통계로도 명백하다. 3.1운동기 내내 한반도에서 목숨을 잃은 헌병과 경찰은 모두 합쳐 고작 8명에 불과하다. 총기탈취나 무장 공격 같은 조직적 폭력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태도다. 도대체 우리 가족이, 이웃이, 동포가 눈앞에서 피와 살을 튀기며 죽어나가는데도 보복적 폭력을 자제했다니 말이다.
평화주의 원칙은 기미독립선언서에 명백히 언명돼 있지만, 다른 이유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엄청난 폭력의 비대칭에서 찾을 수도 있다. 총을 쥔 자와 총을 쥐어 본 일이 없는 자의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 일제는 1의 피해를 100의 폭력으로 되갚았다. 그러니 일본놈 하나 속 시원히 해치우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러야 했을 거다. 한 번의 의분이 수 백 명 동포의 목숨값으로 되돌아오는 참상을 보느니 차라리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길을 택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듯 3·1운동이 견지한 ‘평화주의’는 인간에 대한 긍정과 낙관, 또는 폭력에 대한 절망과 공포가 뒤섞인 딜레마적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짧지만 강렬했던 해방의 희열
이와는 반대로 만세운동을 짧지만 강렬한 환희와 해방으로 기억하는 기록들도 발견된다. 거족적 만세운동에 직면한 일제는 처음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그러한 까닭에 전국 곳곳에서는 일제가 물리력을 정비하고 강력한 무력진압에 돌입하기 전까지 짧은 ‘힘의 공백기’ 누리기도 했다. ‘만세’가 가져다 준 해방의 희열은 뜨거웠다. 생애 처음 자존을 갖게 되고, 입장차와 갈등을 일시에 털어버리고 같은 민족이라는 일체감 속에서 잠시 하나가 된 환희를 경험한 이들 역시 도시민이 아니라 시골의 촌부들이었던 것이다. 고양에서도 일제에 협력했던 면서기와 시위꾼이 함께 어울려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 짧은 기억이 있었기에 3·1운동은 외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아니 해방 이후에도 언젠가는 다시 성취해야 할 기억의 원형으로 민초들의 가슴속에 새겨진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 독립운동사에 투영된 주변적 특성

고양의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며 중심과 주변에 대한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기자 역시 연재 내내 고양땅에서도 중심과 긴밀히 연결되는, 또는 중심 못잖은 강도의 독립운동이 뜨겁게 전개됐음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겼다. 하지만 자료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고, 저것은 부수적 사건이라는 식의 ‘등급’을 매기는 행위가 얼마나 편견적 태도인가를 절감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진 또 하나의 요인은, 현재 고양에서 진행 중인 독립운동 기림사업에서 드러나는 중심과 주변의 미묘한 괴리 때문이기도 하다. 고양시는 공식적으로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70여 분 독립유공자를 기리고 있는데, 이들을 ‘고양 출신’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당시 호적상의 주소지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첫 회 연재에서 지적했다시피 그 기준 자체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기형적으로 설정된 ‘왜곡된 고양군 권역’에 기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이가순 선생과 장효근 선생, 그리고 일산장터에서, 고양동 뒷산에서, 행주나루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1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모두 지금은 서울시 행정구역에서 활약한 이들이다.
물론 그들이 ‘고양군’이라는 호적상의 인연을 맺긴 했지만, 저 멀리 지금의 한남동이나 뚝섬에 주소를 둔 이들까지 ‘자랑스러운 고양의 독립운동가’로 칭하는 것이 무척 어색하기만 하다. 일제가 그어놓은 행정경계를 기준으로 고양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과도한 중심 지향적 역사관이 아닐까.
기자는 3·1운동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중심의 인물들보다 능곡벌판에 수로를 놓은 이가순 선생, 만년을 행주내리에서 보내며 계몽운동을 펼친 장효근 선생, 그리고 일제의 조서에 단 한 줄 남아있는 고양리과 가장리, 송포리와 행주리에서 시위를 벌인 촌부들에게 더 큰 애착이 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기억해 줄 사람은 우리 밖에 없기 때문이고, 그들의 행적이야말로 3·1운동의 주변적 특성, 나아가 이 땅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가장 순수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고양독립운동기념탑 하단 3.1만세운동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작품.


역사가 망각한 주변의 이름들
역사는 끊임없이 ‘현재’라는 관점에서 재편되고 재해석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사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면 ‘관점’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일별할 수 있다.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깔끔히 털어내고 오롯한 독립운동사 정리에 매진했어야 할 시점에 좌우대립과 미 군정,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을 연이어 겪고야 말았다. 그 과정에서 친일은 청산되지 못했고, 독립운동사 기술에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걸림돌이 끼어들고 말았다. 한반도 절반의 독립운동사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실제로 고양지역에서도 흔적 없이 잊혀진 월북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은밀히 전해오기도 한다.
군사정권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추모가 시작됐지만, 편중은 더 악화됐다. 국가주의에 부합하는 소수의 인물만 추려 추앙하는 방식으로 국민계도의 도구를 삼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가 민족적 위인으로 숭모됐지만, 그밖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을 강요받았다. 독재권력으로서는 3·1만세운동의 역동성이 오히려 국가주의를 위협하는 불온함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에도 3·1운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사의 기술에서 중심과 주변의 차별은 반복됐다. 도시가 조명되는 동안 시골은 잊혀졌고, 민족대표가 부각될 때 촌부들은 누락됐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100년이 지나도록 어쩌면 이리도 감쪽같이, 우리는 중심에만 집중해 주변을 잊어버리고 살아왔을까.

한 번도 중단된 적 없는 고양의 독립운동
객관적 시각으로 살피자면, 고양은 독립운동사에서 한 번도 중심에 자리하지 못했다. 민족적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고양의 대표적 독립지사로 꼽았던 이가순 선생과 장효근 선생도 각각 원산과 서울에서 3·1운동의 중심에 섰다가 만년에야 고양땅에 들어와 치수사업과 지역계몽을 펼쳤을 뿐이다.
그러나 고양땅에 살았던 민초들은 역사의 모든 국면에서 한 번도 뒷전에 서지 않았다. 일제의 침탈이 시작될 때는 부역과 수탈에 줄기차게 저항했고, 모든 자연부락에서 남녀노소가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보탰다. 국권이 현저히 기울어가는 시기에는 치열한 의병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뛰어들며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리고 민족의 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른 3·1만세가 터지자, 근거리에 위치한 일본 헌병부대의 진압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누군가는 산에 오르고, 누군가는 장터에 모여들고, 누군가는 배 위에 올라 한강물을 갈라가며 고양의 모든 지역에서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 모든 독립운동의 주체들은 대부분 생산구조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는 농민들이었다. 이렇듯 고양의 독립운동 역사는 ‘중심 없는 자발성’으로 요약되는 주변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양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져 있는 고양출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 일제가 일시적으로 수도 서울 축소 정책으로 고양에 편입한 서울지역 독립운동가들이 기록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도 아쉽다. 주도자 없이 스스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름 없는 고양 농민들에 대한 기록이 별도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며…
100주년이라는, 3·1운동을 온전히 되돌아보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역사를 기린다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 품은 실체와 의미의 지평을 왜곡 없이 현재의 시간으로 호출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은 역사를 박제화, 또는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점만 추려, 또는 대중들이 주목할 만한 요소만을 발췌해 이상화하려는 욕망 말이다.
거대한 기념탑 속에, 화려한 기념행사 속에서 역사의 진실이 실체와 괴리되어 박제화 되고 있지는 않은지 차분히 질문해야 한다. 
시급한 일 중 하나는 일제시대를 경험한 분들의 기록을 성실하게 구술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3·1운동에 대한 직접적 기억을 들려 줄 조상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80대 이상의 토박이 어르신들이라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로부터 들은 만세운동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은 남아 계시지 않은가. 십 여 년만 지나면 이들 3·1운동의 ‘1차 간접진술자들’ 조차도 대부분 세상을 뜨고 말 것이다.
또한 고양땅에서 펼쳐진 사건과 인물들을 구분해 조명하고 기리는 작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일산문화공원에 들어선 고양독립운동기념탑 하단의 독립유공자 기록만 봐도 서훈의 등급에 따라 획일적으로 이름과 공적을 나열해놓아 고양땅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을 그려내기가 요원하기만 하다.
더불어 3.1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의 고통과 열망, 그리고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좀 더 실체적인 논의와 상상을 펼치는 자리가 지속적으로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100년 전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무엇이었으며, 그 나라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꿈꾸는 나라와 얼마나 비슷한가, 또는 다른가를 묻는 질문을 이제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고양의 3·1운동, 미래 100년을 여는 이정표’라는 구호가 실체 없는 수사로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 참고자료 : 『3월 1일의 밤』(권보드래. 돌베게), 『고양 독립운동사』(이정은, 광복회고양시지회), ‘3·1운동의 사상과 세계사에서의 위상’(신용하), ‘기미년 겨레운동 생각,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박영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이만열)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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