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이웃 - 주엽동 사는 류리수 박사, 한국 최초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 출간

현대사의 아픔 온몸으로 겪어낸
평범한 소시민의 20년 작업 매듭
출력본 일일이 타이핑해 최종완성
한국인의 마음과 역사 이해되길
백범 뜻 따라 통일에 힘 모아야

 

류리수 박사의 할아버지 류규동씨(사진 왼쪽)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긴 후 일본 선생님의 추천과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삶을 일궜고, 일본에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아버지 류의석씨(사진 오른쪽)는 자신의 조국인 한국과 일본을 모두 다 사랑한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고양신문]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을 맞았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부터 지금까지의) 그 100년이라는 시간은 틀림없이 일본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이 『백범일지』가 읽혀서 백범 김구가 살았던 시대, 즉 100년 전 우리 일본인도 그와 함께 살고 있었던 시대를 알고, 생생했던 인간들이 헤쳐 나온 시공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통일되지 못한 한반도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커다란 걸림돌을 남기고 있는 채로 있다는 것에 깊이 생각이 미치게 될 것이다.” - 우에노미야코(上野都) 시인의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 감수의 글 중 -

역사의 문을 여는 심정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이 이달 8일 출간됐다. 국내에서 일본어 번역본으로 『백범일지』가 출판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출간한 이는 일산서구 주엽동 강선마을에 사는 류리수 박사다.  

여고시절 윤동주의 시에 감명 받아 40년 이상 한국어를 공부한 능숙한 실력으로 2015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 출판했던 우에노미야코(上野都) 시인은 『백범일지』의 일본어 번역 감수를 진행하면서 ‘역사의 문을 여는 두근거리는 심정’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우에노 시인이 일본어로 읽은 백범일지의 번역자는 류리수 박사가 아니다. 그의 아버지 류의석씨다.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까지 살았던 산골 나가노현 기소후쿠시마를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일본 문학을 사랑하고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산골을 늘 그리워하며 고향의 친구들과 만남과 교류를 이어갔다. 역사를 전공하지도, 번역을 업으로 삼지도 않았다. 다만 한국과 일본을 모두 사랑한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류의석씨는 어린 시절 일본 산골 나가노현 기소후쿠시마(長野県木曽福島)에서 자랐고 해방이 되고나서는 한국에서 지냈다. 성인이 된 후 일본에 갈 때면 고향을 찾아 은사님께 인사드리고 동창들을 만났다. 그는 고향을 16차례 방문했고 친구들과 전화하며 고향을 늘 그리워했다. 일본 친구들도 소학교 졸업식을 못한 채 귀국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2001년 기소후쿠시마 소학교에서 56년 만에 졸업식을 성대하게 열어줬다. 틈나는 대로 일본 친구들도 한국에 초대해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56년 만에 열린 류의석씨의 소학교 졸업식은 화제가 되면서 지역신문에 보도됐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온 소시민, 아버지
그런데 70세가 넘은 시기에 류의석씨는 언제부터인지 백범일지를 붙잡고 있었고, 몇 년의 시간을 쏟은 끝에 마침내 일본어로 번역까지 했다. 한국 최초로 번역된 일본어판 백범일지다. 우리 사회의 어떤 지식인이나 전문가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니 할 생각을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후무(後無)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전무(前無)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인생의 황혼녘이었는데··· 왜일까? 

“진정한 한-일간 우정에 대해 평생 고민해 온 아버지는 『백범일지』가 혹시 일본 친구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냉정하게 대면하며 질문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 친구들도 똑같은 식민시대와 전쟁시대의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이 책이 한국인의 마음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거 아닐까 싶어요.”

유품으로 발견된 일어 원고 
류 박사는 2014년 여름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책장에서 ‘제6차 수정’이라고 적힌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백범일지』 일본어 교정 원고였다. 당초 아버지는 2006년에 『백범일지』를 일본어로 번역했는데 딸인 류 박사 이름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 지인들을 통해 출판사를 타진해 봤지만 결국 모두 거절당했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후로도 꾸준히 6차에 이르도록 수정을 이어온 것을 알게 됐다. 늦었지만 어떻게든 세상에 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출간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컴퓨터 파일이 열리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출력본을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일이 타이핑해 파일로 만들었다. 9차 교정까지 거쳐 최종본을 완성했다. 

한-일 정반대 설명에 당혹
류리수 박사는 그 과정에서 주요사건과 인물에 대한 주해를 달 때 한국과 일본의 설명이 정 반대인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한국 측 자료에 따라 주를 달았을 때 일본인들이 잘못된 편파적인 주해라고 비판하며 『백범일지』 자체를 거짓으로 폄훼할까 두려워 주석을 지웠기도 하고, 또 모호하게 바꾸기도 해봤지만 결국엔 한국 측 자료에 근거에 작성하는 등 번역서의 글 한 자 한 자를 마치 전쟁하는 심정으로 적어갔다. 

한국과 일본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자신과 같은 전공자나 연구자들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출간 과정에서 또다시 일본 쪽 출판사에 가능성을 타진해봤지만 역시 모두 거절이었다. 무수한 혐한서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하우출판사 박영호대표가 뜻있는 일을 함께 하고 싶다며 한국에서 일본어로 책을 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줬다. 

 

일본을 방문한 류의석씨.

 

완전한 통일에 힘 모아야 
마침내 올해 3월 평범한 소시민 류의석의 이름으로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됐다. 따지고 보면 출간까지 거의 2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지금까지 일본어로 된 백범일지는 카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라는 역사 연구자가 1973년 일본 평범사(平凡社)에서 출간한 딱 한 종류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류리수 박사는 “일본인들은 김구 선생을 단순히 테러리스트의 지휘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백범일지를 읽으며 식민지배하에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뎠는지 이해하고 한-일 양국이 혼돈의 시대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책을 출간한 이유를 밝혔다.

또 백범일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그 당시 자신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존재였을지 생각해보는 기회도 됐다. 폭탄을 던지는 독립운동가,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동지를 배신하는 밀정, 일본 지배하의 새 시대에 자신을 합리화하며 순종하는 사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조국의 독립과 완전한 통일에 온몸을 바친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의무임도 새삼 깨닫게 됐다. 

 

“일본인 역시 식민·전쟁시대 피해자,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야기 나누길”

 

온몸으로 겪어낸 현대사 현장 

젊은 시절 류리수 박사의 아버지와 어머니.

백범일지의 번역자 류의석씨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그의 아버지인 류규동씨 때문이었다. 전주농업학교 재학 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일본인 선생님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해방되기 전까지 일을 하며 삶을 일구어갔다. 류규동씨는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다가 1942년 사고로 인해 양쪽 눈을 잃었고 그 후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오롯이 아내 몫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가족들과 함께 고향인 전주로 돌아온 류의석씨는 귀국 후 생활고와 한국어 발음문제로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중·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 2때는 한국전쟁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1952년에는 육군사관학교 입학해 연대장으로서 학년의 리더 역할을 하던 중 4학년 졸업직전 전교생을 대표한 제안을 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그 후 지방의 영어교사 생활을 하다가 어학실력을 현장에서 살릴 수 있는 무역업, 국제경제 업무를 하게 됐고, 특히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활발히 하며 한국경제 발전을 위한 일에 매진했다. 

류리수 박사는 “아버지는 일본 친구들도 똑같은 식민시대와 전쟁시대의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이 책이 한국인의 마음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류리수 박사는 “일본문학 전공자 이상으로 일본문학을 읽고 사랑했으며, 특히 한국문화의 일본전파에 관한 서적을 찾아서 공부하며 역사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 왔다“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냈다. 고교 때 이과였던 자신이 일본 근대문학을 전공으로 박사과정까지 하게 된 것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세대를 관통하는 스며듦 
현직에서 은퇴한 후 류의석씨는 고양시 문화센터에서 일본어 강의 봉사, 외국인 성지순례 봉사를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백범일지 번역을 진행해갔다. 2014년에 사망한 그는 이미 10년 전인 2004년에 유서를 써놓을 정도로 남모를 심신의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박사는 “그러면서도 백범일지를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일본에까지 알리고 싶었던 것이 생의 마지막 염원이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법철학 강요』 서문 말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갯짓을 시작한다”고 썼다. 한 개인의 시대가 마감되는 ‘황혼’이야말로 지혜라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제대로 날개를 펴기에 적합한 시기일지 모른다. 한 사람의 생이 오늘로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니다.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의 생이 펼쳐진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생각은 완결이면서 동시에 내일 또 다른 사람의 생에 스며들게 마련이다. 류의석씨가 생의 황혼녘에 백범일지를 손에 붙들고 놓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당대를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다음 시대에 스며들게 될 존재이다. 류규동-류의석-류리수로 이어지는 세대를 잇는 스며듦처럼.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가 모셔져있는 납골당을 찾아 『백범일지』를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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