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태원

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 소장

[고양신문] 얼마 전, 정부부처의 한 공무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보일러와 냉동기 등 설비를 만드는 기업의 대표들이 몰려와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당초 중소기업이 맡고 있던 시장에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들이 뛰어들면서 중소기업들이 다 문을 닫게 생겼다며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하소연했다는 내용이다. 대규모 자본으로 자동화된 생산시설을 무기로 대량생산을 추구하는 대기업과 싸워 영세한 중소기업이 당해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분야는 유가변동과 온실가스 감축압박, 최근의 미세먼지 대책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다양해져,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해오던 터였다. 하지만 자본은 이미 그들이 석권하고 있던 냉방기기 등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폐쇄된 통합관리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다른 제품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소비자의 다양화된 요구에 따른다는 명목이지만, 결국 선택권이 한 회사의 제품, 즉 자본에 종속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자본주의란 자본을 통해 인간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후반 이후 등장해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제체제가 된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인류에게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25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농경문화 이래 인간을 육체노동에서 해방시킴과 동시에 생산성도 크게 향상시켰고, 그 결과로 엄청난 부를 만들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반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인간을 위한다는 생산 활동의 최종 목적에 위배되어 사회적, 환경적, 합목적적 등의 측면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인간성의 소외, 교통 혼잡 등 도시화에 따른 부작용과 환경 파괴와 서정성 상실 등이 그것이다. 또 획일적인 고객 욕구를 양적으로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됐던 과거와 달리, 급격히 개성화, 다양화되고 있는 오늘날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 열병을 앓고 있다. 모든 계획과 문서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허둥댄다. 정보통신기술과 인공지능 같은 말들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정부의 중장기 종합대책도 맞춤형 서비스로 삶이 편리해지고 안전해지는 대신, 양극화가 심화되고 분쟁이 증가하며 개인정보 유출과 인간 소외가 우려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자본주의 문제가 더 심화된다는 건데, 이걸 혁명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현대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있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자본과 지식정보를 특정 집단이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일 가능성이 높다. 즉, 대규모 자본이 없이도 누구나 생산과 유통, 판매와 소비의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세계, 정보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개인이나 주체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안전이 보장되는 지식정보 공유 세계이지 않을까.

예로써, 지금의 경제체제에서 일반인이 자동차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동화된 생산라인과 판매를 위한 유통망을 갖추기 위해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지식도 없고, 이용하면서 스스로 생산한 정보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듯 자동차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 즉 수많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고파는 새로운 시장인 열린 플랫폼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소비자는 직접 시장에서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소프트웨어를 조사한다. 선택한 후에는 그 소프트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품인 하드웨어들을 구입해 인근 조립공장으로 보낸다. 물론 스스로 조립할 수도 있다.

조립이 끝나면 선택한 소프트웨어를 내려 받아 자동으로 설치되면 원하는 제품이 완성된다. 원할 때는 언제나 소프트웨어와 부품들을 스스로 바꿀 수도 있다. 모든 참여주체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형태로, 일자리가 다양해지고 경제에 활력을 줄 수도 있다.

대량생산 체계로 대량소비를 이끌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주역을 자임해온 대기업이 앞으로도 그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모 대기업 임원 후보자들을 대상을 한 강연 자리에서 던진 질문이다. 갈수록 현명해지는 소비자의 명령과 요구를 외면하며 대비를 게을리 한다면, 병들고 고장 난 자본주의의 계승자는 생각보다 빨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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