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웃의 따듯한 울타리
새로운 이웃의 고향으로 '허물어 커지다'


일산신도시 발표와 고양시 승격, 지방자치시대 개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30년어간의 역사가 됐다. 숨 가쁘게 전개된 고양의 역사 30년을 일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1989년 창간한 고양신문의 뉴스를 찾아보는 것이다. 30년 동안 고양신문은 1422번의 신문을 발간했고, 고양신문을 거쳐 간 수십여 명 기자들이 그 기간 동안 생산한 기사는 어림잡아 6만 꼭지가 넘는다. 그 중 1면을 장식한 뉴스들만을 살펴봐도 고양시가 통과해 온 시간의 커다란 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창간호부터 지난 주 발행한 신문까지, 고양신문 헤드라인 뉴스를 바탕으로 분야별로 흐름을 짚어보았다.                                      


전통마을을 버려야 했던 토박이들

1989년 4월 말, 정부의 일산신도시 개발이 발표됐다. 7만5000채 아파트를 지어 3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하는, 단군 이래 최대 건설사업을 고양군 일산땅에서 시작하겠다는 것. 수용되는 땅 460만 평 중 80%는 절대농지였다. 대대로 농사에 기대어 살아온 1만여 명 주민들로서는 삶의 뿌리를 흔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들은 정부발표 사흘째부터 반대 투쟁에 들어갔고, 토지수용을 비관한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보가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확고부동했고, 보상절차가 시작되자 주민들의 저항도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수용이 시작되며 대대로 전통마을을 지키며 살았던 토박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새로운 땅을 찾아 농사를 이어갔지만, 많은 이들이 농사를 놓고 신도시 주민으로 편입됐다. 그러나 땅을 밟고 살던 감각을 버릴 수 없었던 일부 원주민들은 주민회나 노인회 간판을 빌려 아파트 뒷산에 천막을 치고 반가운 얼굴을 만나기도 했다.


이주자들이 세운 새로운 고향

일산신도시는 고양땅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연이어 성사, 화정, 행신, 탄현, 중산지구 택지개발이 줄줄이 발표됐다(1989~1991). 이들을 합치면 일산신도시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인구도 속속 증가해 고양군 시절 20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순식간에 50만, 80만 명을 넘어섰고, 삼송과 원흥, 대화, 가좌, 식사, 풍동에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2015년 드디어 전국 10번째로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는 ‘이주자들의 거대도시’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30년이란 세월은 이주자들에게도 새로운 정주의식을 심어주었다. 녹지 비율이 높고 쾌적한 환경은 상대적으로 높은 주거만족도로 반영됐다. 1기 신도시 중 일산이 가장 살기 좋다는 발표(2004)와 많은 주민이 일산에 계속 살고 싶어 한다는 조사결과(2009)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일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은 신도시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는, 나름의 정체성을 품으며 성장했다. 소설가 김훈은 고양의 이웃들을 향해 “우리는 타향에서 고향을 건설해야 한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낙후의 세월 감내한 원도심 주민들

고양에는 토지를 수용당한 원주민과 아파트로 들어온 이주민만 있는 게 아니다. 30년 전 고양군 인구의 대부분은 원당, 능곡, 일산, 화전, 관산동, 고양동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구도심 주민들이다. 70~80년도 산업화시기, 서울은 밀려드는 인구를 소화하지 못해 주변에 수많은 변두리 인구밀집지역을 양산했다. 경계를 마주한 고양군도 그 중 하나였다.
곳곳에 들어선 저층아파트와 빌라가 인구를 꾸준히 흡수했고, 상권과 소도심을 형성했다. 하지만 신도시 개발과 함께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역전됐다. 허허벌판은 신도시가 됐고, 원당과 능곡, 벽제 등은 하루아침에 ‘구도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구도심은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진행형 군사규제와 그린벨트

신도시 발표가 나기 전 고양군은 북한과 인접한 접경지역 이미지가 강했고, 대부분의 땅은 그린벨트와 절대농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교육여건도 열악해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서울로 전학시키기 위해 애를 태워야 했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낳은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완충지대가 바로 고양땅이었다. 이러한 흔적은 지금까지도 남아 서울의 기피시설들이 여전히 고양의 울타리 안을 떠날 줄 모른다.
그린벨트 역시 무분별한 개발을 억제하는 저지선 역할을 했다지만, 자그마치 50년 세월 동안 재산권이 묶인 손실과 고통은 고스란히 주민의 몫이었다. 고양은 오래 전부터 그린벨트 해제를 요구하는 주민투쟁(1993)이 전국에서 가장 뜨겁게 일어났던 곳이다. 덕분에 고양시 여러 곳이 순차적으로(1999, 2004) 그린벨트에서 풀려났지만, 국가의 설계에 의해 운명이 갈리는 희비극은 창릉신도시가 전격 발표된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아직도 요원한 자족시설 확충

신도시 주민들은 베드타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자족시설의 확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초기에는 출판문화단지, 외교단지, 남북교류거점 인프라 등이 거론됐지만 하나 둘 물거품이 됐다. 약속대로 들어선 시설은 킨텍스 하나뿐이었다(2005). 이후로도 한류월드, 차이나타운 건설 청사진이 무산됐고 방송산업 유입을 기대했던 MBC도 본부를 상암동으로 이동하며 허탈한 뒷맛만 남기고 말았다. 강매동 자동차클러스터 계획(2012) 또한 찬·반 양론 속에 여전히 해법이 요원하다.
장항동과 대화동 일대에 들어설 예정인 방송영상밸리와 경기북부테크노밸리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CJ가 적극 추진하는 라이브시티(전 K-컬처밸리) 사업 역시 한류천 수질문제라는 뜻밖의 걸림돌을 만나 신호대기 중이다. 고양시민의 갈증을 풀어 줄 시원한 소식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소비자의 쇼핑 천국, 자영업자는 생존 전쟁

신도시 개발과 함께 고양은 쇼핑 천국이 됐다. 백석동 이마트(1994)를 시작으로 대형매장이 속속 들어서 1999년에는 백화점이 3곳, 대형할인매장은 무려 8곳이 포진한다. 당연히 과당 경쟁이 뒤따랐고, 아파트 단지 소상공인들이 직격탄을 맞아야 했다. 특히 백화점과 할인매장에서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는 자영업자와 버스업체의 공공의 적이 됐다(1998).
2000년대는 신개념 스트리트형 쇼핑몰이 붐을 일으켰다. 장항동을 중심으로 라페스타, 웨스턴돔이 연이어 문을 열었고, 뒤를 이어 원마운트와 가로수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2017년에는 모든 싸움을 평정할 궁극의 강자가 등장했다. 초대형 쇼핑몰 스타필드와 세계 최대 가구매장 이케아가 나란히 문을 연 것. 쇼핑 천국 고양시의 이면에는 생존 전쟁터에서 몸부림치는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이 숨어있다.
 

국회의원, 중앙무대 거물 줄줄이 배출

30년 동안 고양이 배출한 정치인을 살펴보면 면면이 화려하다. 이택석 의원은 내리 3선(1988, 1992, 1996)을 하며 명성을 떨쳤다. 15대 총선(1996)까지 보수후보(이택석, 이국헌)를 선호했던 유권자들은 고양의 이웃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후 치러진 16대 총선(2000)에선 4석으로 늘어난 모든 선거구에서 진보진영(새천년 민주당) 후보(곽치영, 이근진, 정범구, 김덕배)를 당선시켰다. 이어 보궐선거에선 유시민 후보(개혁국민정당)에게 첫 금배지를 달아주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여파 속에 치른 17대 총선(2004)에서도 유시민, 최성, 한명숙 후보가 보수 후보를 눌렀고, 김영선 후보만 한나라당의 깃발을 지켰다.
하지만 18대 총선(2008)에선 새누리당 후보 4명(손범규, 김태원, 백성운, 김영선)이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했다. 그러나 표심은 또다시 요동쳐 19대(2012)에선 심상정(당시 통진당), 유은혜·김현미(민주통합당) 후보가 새누리당 후보를 눌렀고, 김태원(새누리당) 후보만 금배지를 지켰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대(2016)에서도 심상정(정의당), 정재호·유은혜·김현미(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돼 범 진보진영 강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양에서 금배지를 단 이들 중 국무총리와 장관, 당대표로 성장한 이들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지역주민의 자부심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중앙무대 지명도를 얻는 등용문 역할만 했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들린다.
 

지방자치 이후 민선시장 5명

고양의 자치를 이끈 첫 주자는 고양군 시절 원당읍장을 지냈던 신동영 시장이었다. 그는 1기 민선시장에 당선(1995년)된 후 1998년 다시 시민들의 표심을 얻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9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어 보궐선거를 통해 황교선 시장이 취임하지만 단임에 그치고, 강현석 시장(2002, 2006)과 최성 시장(2010, 2014)이 각각 8년간 고양시정을 이끈다. 그리고 지난해 이재준 시장(2018)이 ‘평화와 경제’를 표방하며 임기를 시작했다.  
 

물난리, 화재… 안타까웠던 순간들

30년 동안 고양 곳곳에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이어졌다. 1990년 한강둑 붕괴로 고양시 대부분이 물에 잠기는 커다란 수재가 발생했다. 1992년에는 건설 중인 신행주대교가 완공 4개월을 앞두고 붕괴됐고, 1999년에는 원당에서 장애아동을 포함해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당하는 좌석버스 충돌사고가 발생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2010년 이후에도 고양종합터미널 화재(2014), 와이시티 앞 땅꺼짐(2017), 백석역 부근 온수관 파열(2018) 등의 안전사고가 이어져 주민들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특히 와이시티 땅꺼짐과 백석역 온수관 파열은 지대가 낮은 농경지를 매립해 조성한 일산신도시의 땅 밑 사정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걱정하게 하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우리는 반대한다… 개발의 갈등 

개발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반대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일산신도시 반대투쟁(1989)에 이어 강매동에서는 대형 저유소 설치 반대운동(1991)이 일어났다.
일산신도시 입주를 시작한 1992년에는 학교와 교통, 의료 등 생활기반시설이 부족해 주민들의 불편과 염려가 증폭되기도 했고, 이듬해엔 문봉가스충전소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전개돼 일부 주민이 구속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1993).
주민들의 의식과 관심이 지역사회의 정책을 조율한 사례도 등장한다. 시가 일산호수공원에 위락시설을 설치하고 유료화하는 방안을 검토하자,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반대 여론을 만들어 계획을 철회시켰고(1997), 학교 주변에 러브호텔 건립을 허가하자 학부모와 주민들이 결집해 러브호텔 반대운동을 거세게 전개해 전국적 이슈를 낳기도 했다(2000).

2000년대 이후에는 환경적 관점의 논란이 전개됐다. 풍동과 개명산 개발 계획이 연이어 터지며 무분별한 개발과 보존 사이의 논쟁이 불붙었고(2001), 고봉산 기슭까지 아파트를 세우려 하자 주민과 환경단체가 힘을 모아 안곡습지를 지키는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2006). 그러나 2015년부터 표면화된 산황동 골프장 증설 논란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원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풀릴 줄 모르는 교통 체증

신도시 발표와 함께 3호선 일산선 연장이 발표됐고, 시민들이 목소리를 모아 4개월 만에 원당역을 유치하는 성과를 얻어냈지만 개통은 기대보다 늦어졌다(1996). 자유로 1·2차 구간이 각각 시원한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92년과 1994년이었다.

경의선 복선 공사는 주민들이 일부구간 지하화를 요구했지만, 끝내 지상전철로 완성됐고(2009), 지역별로 찬·반 논란이 갈렸던 경전철 공사는 결국 무산됐다(2008). 고양종합터미널은 2012년이 돼서야 비로소 문을 열었고, 제2자유로도 2011년에 늑장 개통했다. 일산과 강남을 연결하는 GTX 노선은 일찌감치(2011) 노선이 확정됐지만, 8년이 된 지금도 착공식만 마친 상태다.
 

시민들이 사랑하는 공간, 호수공원

1989년 개관한 고양군민회관(현 고양시청 문예회관)은 고양의 첫 대규모 공연무대로서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고양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일산호수공원은 1996년 개장했다. 초기에는 나무그늘이 부족한 미완의 공간이었지만 도시와 함께 호수공원의 나무들도 나이를 먹어 지금은 울창한 녹지와 시원한 호수가 어우러진 명품 도심공원이 됐다.
2000년대 중반에는 덕양어울림누리(2004)와 고양아람누리(2007)가 순서대로 문을 열었다. 특히 고양아람누리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명품 공연장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췄다. 어린이들의 체험형 학습놀이터인 고양어린이박물관은 2016년 개관했다.
그러나 신도시 초기부터 논의가 오고 갔던 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시립미술관 등의 시설은 계획이 철회됐거나 기약 없이 연기돼 문화적 갈증을 더하고 있다.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의 숨결

역사·문화재 소식으로는 고양가와지볍씨발굴(1991), 밤가시초가 보존(1991), 서오릉과 서삼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2009), 서삼릉 태실 담장 제거(1996), 도내동 구석기유물 대량 출토(2018) 등을 꼽을 수 있다.
무형문화로는 행주대첩제, 정발산도당굿, 고양8현제향, 고양상여회다지소리, 진밭두레패, 송포호미걸이, 송강문화제, 행주나루 강풍어제 등이 전통을 이어오며 고양의 정신과 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역도 장미란, 쇼트트랙 김아랑

고양이 배출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한국 역도의 간판 장미란 선수다. 장 선수는 고양시청 선수로 소속을 옮긴 후 세계역도선수권대회 3연패(2007),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2008)등의 낭보를 전하며 고양시민들을 환호케 했다.
2012년부터 고양체육관을 홈으로 사용한 고양오리온 프로농구팀은 당당히 챔피언에 등극(2016)해 농구팬들의 갈채를 받았다.
2011년 고양에 둥지를 튼 고양원더스 야구단은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독립리그’라는 개념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지만 아쉽게도 3년 만에 항해를 멈추고 말았다(2014).
2018년에는 고양시 쇼트트랙팀 소속 김아랑 선수와 곽윤기 선수가 평창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등극하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고양

고양시 인구의 2%에 불과하지만, 농업인들이야말로 가장 오래도록 삶을 통해 고양땅의 전통과 역사를 지켜온 이들이다. 현재 고양시에는 9개의 지역농·축협이 있는데, 2015년 제1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가 치러졌다.
지역농협 로컬푸드직매장이 문을 연 해는 2014년으로, 소비자와 생산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고양시 곳곳에 로컬푸드직매장이 속속 개장하며 고양은 ‘로컬푸드 사업의 메카’라는 위상을 다져가고 있다.  
 

30년 만에 재연된 신도시 충격

1기 일산신도시가 발표된 1989년 4월 이후 정확히 30년이 흐른 2019년 5월, 국토부가 창릉 3기 신도시를 발표하자 토지수용 당사자들이 아닌 1기 신도시 일산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기 때는 논과 밭을 빼앗길 수 없다는 외침이었다면, 이번에는 일산 주택가격 하락 우려가 반대의 이유다.
신도심과 구도심은 또 한 번 역전을 연출할까? 일산 주민들의 반발은 어떻게 전개될까? 창릉 신도시는 고양시 전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까? 지금으로서는 모든 게 물음표지만, 30년 전처럼 정부 주도의 일방적 개발 드라이브가 통하던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고양의 새로운 30년이 궁금하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고양신문을 펼쳐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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