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발행인 나진택 목사

대학생 신분으로 ‘주간고양’ 창간
하나부터 열까지 첫 길 개척하며
패기·열정으로 지역 언론 깃발 올려

 


▶젊은 나이에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복학생 시절이던 1987년 백마지역기독청년연합회 활동을 했고, 같은 시기 당시 송달용 고양군수가 마련한 대학생들과의 모임을 계기로 고양군대학생향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마침 그해 겨울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범 재야세력이 꾸린 국민운동본부 고양군 공정선거감시단 집행위원을 맡게 됐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사회와 지역에 대한 눈을 뜨게 됐다.

 

▶지역신문을 만든 이유는.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지방자치 도입 발표를 듣고, 지역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홍성에서 우리나라 첫 지역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버스를 갈아타고 무작정 홍성신문을 찾아갔더니 해직기자 출신 편집장이 너무도 친절히 맞아주며 지역신문 창간을 위한 노하우를 하나하나 가르쳐줘 용기를 얻고 돌아왔다.

 

▶등록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 지역신문은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였는데, 까다로운 행정서류를 하나하나 구비하며 10번 이상 문공부를 들락거렸다. 가장 큰 걸림돌은 윤전기 확보였는데, 고맙게도 지인의 소개로 윤전기 사용계약서를 받아내 마침내 ‘주간고양’이라는 이름의 지역신문 허가증을 받아 쥐었다. 윤전기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따끈한 창간준비호를 찍어낼 때의 첫 감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설렌다.

 

▶창간 후 가장 먼저 마주한 소식은.

4월 말 창간 준비호를 찍는 날, 정부의 일산신도시 개발 뉴스가 터졌다. 소름이 돋았다. 이어 한 달간 준비를 마치고 일산신도시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 6월에 창간호를 냈다. 당시가 대학생 4학년 시절이었는데, 1년 전 결혼한 아내와 함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창간호에 실린 고양군 그림지도도 아내가 직접 그린 작품이다. 신문제작에 합류한 몇몇 창간 멤버들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지만, 뿌듯하고 즐거웠다.
 


▶사무실과 자금 사정은 어땠나.

능곡 허스프라자 허석 대표가 건물 1층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줬다. 창간호는 야심차게 3000부를 찍었다. 열심히 독자를 늘리고, 부지런히 광고를 따내려고 애썼지만, 곧 자금 압박을 피할 수 없었다. 이은만 고양문화원장을 찾아가니 젊은이가 지역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며, 신문사 경영에 합류할 뜻을 밝혔다. 그래서 이은만 원장에게 발행인 자리를 넘기고, 나는 지면 편집권을 맡아 함께 신문을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90년 여름에 한강둑이 터지며 고양이 물바다가 됐을 때, 국방부 헬기를 타고 수해현장 곳곳을 살피며 사진을 찍었다. 경험도 자금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젊음과 패기로 지역의 현안을 마음껏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 한 부를 만들려면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조판을 하고 동판을 뜨고 윤전기를 돌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한밤중이 돼야 겨우 작업이 끝났고, 다음날 아침에는 신문사에서 일일이 발송작업을 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지역언론의 첫 길을 간다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거다.

 

▶고양신문 30주년을 맞았다. 소감은.

만감이 교차한다. 창간 때 함께 고생했던 이들을 꼭 한번 다시 만나 밥 한 끼 함께하고 싶다. 신문은 늘 권력과 긴장관계를 가져야 한다. 30살이 된 고양신문이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으로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강화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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