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희망이 싹튼다. 원흥 도래울마을 연합회 & 행복한 덕은동 가꾸기 협의회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저서를 통해 민주주의의 동력은 ‘갈등’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한 사회의 주요한 갈등들이 확대되고 또 통합되면서 그 갈등들을 조율하고 다루는 과정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또 시민성도 더 강화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결사체’를 통해 압력을 행사하고 논의하며 때로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의 ‘갈등’은 대부분 ‘민원’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얼핏 비슷한 용어로 느껴지지만 ‘민원’은 개별적인 형태로 행정 권력의 공정함과 선의에 읍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양시의 현실 또한 이러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30년의 도시화를 거치며 ‘전통적 공동체’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있는 반면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체의 성장은 아직까지 미약한 상태다. 주민자치와 공동체 활성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역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을 조율하고 해결하는 역량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해 ‘갈등’을 조율하고 해결하는 모습들이 맹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원흥 도래울아파트 7개 단지가 모여 있는 ‘도래울마을연합회’와 화전동 11,12,13통이 중심이 된 ‘행복한덕은동가꾸기협의회’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서로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두 곳 모두 마을문제 해결을 위해 주민들의 스스로 조직한 ‘결사체’로서 지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을 조율·해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작은 일 하나도 입주민과 함께 결정하고
내 이익보단 마을의 공공적 이익 고민

<원흥 도래울마을 연합회>

올해로 입주 7년째를 맞이한 원흥도래울마을은 LH가 1차 보금자리지구로 개발한 아파트 단지다. 지역명인 도내동과 울타리라는 의미가 합쳐진 도래울이라는 이름은 입주민들이 온라인 카페를 통해 직접 공모했다고 한다. 동네에 대한 애착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독 아파트단지가 많은 고양시지만 그중에서도 도래울마을연합회를 중심으로 뭉친 이곳 주민들의 활동모습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곳 연합회는 각 단지 간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수준을 넘어 마을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이를 통해 문제해결까지 나서고 있다. 작은 주민모임에서도 어려운 일을 7단지 8300세대가 모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 연합회 차원에서 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는 입주예정자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온라인 카페로 시작했어요. 차츰 가입규모가 늘어나더니 어느새 원흥지구 전체를 대표하는 커뮤니티로 발전하게 됐죠. 신기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일까 궁금해서 한번 오프모임을 가졌는데 오신분들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아파트 주변 여러 지역현안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왔죠. 마침 제가 카페지기를 맡고 있다 보니 얼굴마담만 해주면 다들 적극적으로 힘을 모으겠다고 해서 입주예정자 대표역할을 하게 됐어요.”

김현준 도래울마을연합회장의 이야기다. 당시 연신내에 살면서 일산으로 직장을 다녔던 그는 출퇴근길에 보이던 황토빛 나대지에 보금자리 주택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2011년 분양신청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입주를 앞두고 특고압 송전탑 위치조정 등 현안해결을 위한 활동을 해오면서 신뢰를 얻기 시작한 그는 2013년 입주 후에도 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다. 

지금은 번듯한 아파트단지로 거듭났지만 입주 초창기만해도 도래울 마을은 기반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황량한 모습이었다. 때문에 도래울마을 주민들은 연합회를 중심으로 휴대전화 통신을 위한 옥상 중계기 설치, 주차장 문제, 버스노선 확보 등 다양한 현안해결을 위해 LH와 시를 상대로 협상해가는 등 노력했고 많은 성과들을 거둘 수 있었다. 단순히 목소리만 높이고 주장하기 보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대안을 요구해왔던 까닭에 행정과의 논의 과정도 순조로웠다. 

김희성 간사는 당시 열악한 대중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던 중 연합회에 참여하게 된 케이스다. 김 간사는 “내 집 마련을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다 보니 특히 입주민들의 관심도 높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다 보니 결속력이 다져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입주민의 75%이상이 입주 당시 30~40대의 젊은 층이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적어도 이곳 입주민들은 ‘내 문제’를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파트 각 단지가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뭉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을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뭉칠수록 좋은 건 사실이지만 서로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하는 과정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김현준 회장은 도래울마을 높은 결속력 비결을 묻는 질문에 “서로간의 배려심 덕분”이라고 답했다. 

“물론 아파트 단지 규모가 다른 지역에 비해 작은 편이어서 가족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점도 있죠. 그보다 중요했던 점은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보단 어떤 방향이 마을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는지 논의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마을도서관 부지선정을 할 때도 서로 내 단지 앞에 유치하려고 하기 보단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진행했어요.” 

이처럼 지난 몇 년간 굵직한 현안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연합회는 나름 합리적이고 공평한 의사결정구조를 가져가려고 노력했고 또 그러한 모습에 입주민들이 신뢰를 보이면서 지금까지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입주하게 된 단지들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에 융합될 수 있었다.

5단지 호반베르디움 아파트 김종훈 입대위 회장은 “처음에 입주하고 먼저 구성된 연합회장단의 활동모습을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사사로운 이익 없이 항상 마을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묵묵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결합하게 됐고 같이 활동하면서 조금씩 동네가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도 많이 느낀다”고 전했다. 민간아파트단지라는 이유로 주변 공공주택, 임대아파트를 차별하는 모습은 적어도 이곳 도래울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이 또한 연합회 구성원들의 노력과 신뢰를 통해 이뤄낼 수 있었던 부분이다. 

도래울마을연합회가 지역현안을 해결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케아 교통 문제였다. 김희성 간사는 “광명이케아 사례를 봤을 때 교통문제가 가장 우려됐는데 가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됐던 5단지는 아직 입주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연합회 차원에서 5단지 입주예정자들을 만나 함께 싸우기로 의견을 나눴고 공청회 등 수차례 협의과정을 거치며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이야기했다. 연합회차원에서 힘을 모아 대응하다보니 지역구 심상정 국회의원 또한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결과 이케아 측으로부터 주차장을 2배로 늘리고 도로를 넓히는 등 추가대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도래울마을 전체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연합회이지만 한편으로 님비적 태도가 아닌 공공적 가치를 고려한 문제해결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인근 음식물처리시설인 삼송바이오매스에 대한 연합회 측의 대응은 꽤 인상적이다. 

“도시를 계획하면서 당연히 필요한 시설이잖아요. 게다가 저희가 입주하기 전에 먼저 위치가 결정난 시설인데 단순히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이전요구 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인근 단지에서 냄새가 난다고해서 저희가 직접 확인한 다음 의견을 모아서 바이오매스 측에 전달했었죠. 다행히 그쪽에서도 굴뚝을 높이는 등 개선대책을 마련해주면서 합의안을 마련할 수 있었죠”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독단과 아집에 빠지지 않기 위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한 번씩 입주민들에게 논의를 붙이고 고민해가며 마을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도래울마을연합회. 8년간의 활동을 거치며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현안 해결뿐만 아니라 함께 더불어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마을공원 살리기, 상수도 보상 운동하면서 
원주민과 이주민, 젊은이와 어르신 하나됐죠


<행복한 덕은동 가꾸기 협의회>

화전도시재생사업이 한창인 화전역 인근에서 대로를 건너면 옛 동네분위기가 물씬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자연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 화전 11, 12, 13통은 몇 년 전부터 신규빌라단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과 빌라주민들이 함께하는 주민공동체가 형성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곳 단체의 이름은 ‘행복한덕은동마을가꾸기협의회’. 동네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모임에서 시작해 지금은 마을일을 함께 논의하고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협의회 대표를 맡고 있는 안희정씨는 2년 전 신규빌라를 분양받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어르신들과 살갑게 지내며 동네일에 앞장서고 있지만 이곳에 이사오기 전까지만 해도 동네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해요. 그전에 아파트에 살 때는 이웃이 아는 척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했고 학부모 모임이나 동네 아줌마 모임에도 전혀 나가본 적이 없었어요. 이 동네에 온 것도 조용해서 온 것이지 동네에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죠.”

그랬던 안씨가 마을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7년 단지 앞 공원문제 때문이었다. 분양 당시 공원이 지어지는 것으로 듣고 왔던 땅이 공원일몰제로 인해 공원계획이 소멸될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급하게 민원도 넣고 시청에 찾아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신통치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동네사람들이 뭉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개별민원을 넣은 집들만 열 곳이 넘었지만 행정의 답변은 다 똑같았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처음 주민모임도 가져보고 돌아가면서 1인시위도 하는 등 집단적인 방식으로 문제해결에 나서기 시작했어요.”

빌라주민들을 중심으로 공원해제 반대운동을 이어가면서 안씨는 단순히 현안대응만이 아닌 상시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주민모임의 필요성을 느꼈다.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공원문제를 계기로 ‘행복한덕은동가꾸기협의회’라는 이름의 주민공동체를 결성했다.

처음에는 빌라주민들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꾸려졌지만 마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원주민들까지 함께하는 외연확대가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협의회는 마을잔치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쳐가며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어울리고 섞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시선이 썩 곱지만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김향숙씨는 “어느 날 봤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뭔가 동네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내심 혼자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얻는 게 있으니 저러려니’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우연히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으면서 김씨는 그동안의 생각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사실 오래 살았지만 저는 서울로 출퇴근만 했지 이 동네에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소외된 지역이라 불만도 많았어요.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 동네를 정말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도 몰랐던 동네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조금만 개선하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때 감동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협의회가 명실상부한 이 동네의 대표 주민기구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작년 LH향동지구 관련 상수도공사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LH측은 주민 동의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이 동네 마을길을 가로지르는 공사를 진행했었다.  

“빌라단지뿐만 아니라 동네주민 전체가 나서서 이 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대책위를 구성해 싸워왔어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던 것 같아요. 하루에도 10명 이상 만나며 의견을 듣고 서명도 받고. 이 동네 주민이 약 600명 정도 되는데 그때 서명받은 인원이 300명 가까이 됐던 것 같아요.”

어려움도 많았다. 싸움과정에서 LH에서는 끊임없이 개별보상을 통해 문제를 적당히 덮으려는 시도를 했다. 안 씨는 “몇 번 따로 만나자는 제안이 왔지만 공식적인 테이블이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공식적인 협의과정을 통해 논의하지 않으면 자칫 주민들끼리 반목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LH와의 싸움과정에서 끊임없이 주민들의 협의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 LH측의 공식사과와 함께 주민불편 해소방안과 마을지원기금 등 보상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안 씨는 “비록 공사초기에 거짓말을 한 부분에 분노하긴 했지만 상수도공사 자체가 공공적으로 필요한 사업이기도 하고 나중에 책임자가 큰절로 사과하는 과정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분들의 입장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합의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1년간 지속됐던 이 싸움은 한편으로 보면 빌라단지 주민들과 원주민들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 김경순(71세) 어르신은 “소외된 지역이다 보니 그동안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제대로 항의해볼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상수도공사 문제가 터지고 나서는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이끌어줘서 처음으로 우리 권리를 찾는 경험을 했다. 이제는 이분들이 뭔가 한다고 하면 적극 지지하고 함께하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했다.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협의회는 이제 현안대응을 넘어 마을발전과 주민들의 행복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LH로부터 받은 5000만원의 마을기금은 앞으로 동네도서관이나 마을카페 등 주민공동시설 마련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주민들끼리 나눠 갖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면 푼돈밖에 안 되잖아요. 그보다 주민 전체를 위한 시설에 투자하는 게 훨씬 마을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뭔가 성과도 남기고 의미도 있고. 앞으로 동네에서 생기는 돈들은 가급적 마을기금으로 모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에요.”

이와 함께 협의회는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부터 덕은학당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문학교실, 요가교실, 영화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지역현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시도의원 간담회 및 마을총회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요리교실(고양시자치공동체지원센터), 그림교실(경기문화재단) 등 각종 공모사업에도 선정돼 진행하고 있다. 

“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이곳에 평생 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민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았고 마을에서 친구를 얻은 것도 너무 행복해요. 이런 즐거움을 이어가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동네발전을 고민하고 현안들을 해결해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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