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유정길> 동학 126주년, 3·1혁명 100주년, 6월 항쟁 32주년, 그리고 촛불 2주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26년 뒤 3.1혁명으로

지난 6월 7일 충북 보은군 종곡리, 옛이름 북실마을터인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보은취회가 열렸다. 동학의 얼을 남달리 생각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외부지원 없이 21년째 해온 행사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 3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수 만 명의 민중들이 이곳에 모였다. 이들은 한 달 간 오늘날 캠핑촌처럼 공동체로 들살이를 하며 대규모 집회를 했다. 민가의 피해도 주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공동체생활하며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로 노비해방과 신분철폐, 탐관오리의 징벌, 토지균분 등 혁명적인 의지를 모은 곳이 바로 이 ‘보은취회’였다.

이듬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농민군들이 관군·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하여 지친 몸으로 다시 이곳 북실마을에 집결한 때가 12월이었다. 눈 덮인 추운 겨울, 결국 이곳은 일본군·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2600명이 전사한 격전지이자 학살터가 되었다. 동학의 시작과 끝이 된 곳이다. 그때 그 함성은 허공 속 메아리가 되었지만 지금 그 피와 살은 땅 한 뼘만 파도 흘러나올 것 같고, 원혼과 비명은 풀 한포기 나무와 바위 속에 깃들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그들은 좌절된 듯했지만, 26년 뒤 이 보은취회와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통령이자, 천도교 3대교주인 손병희가 1919년 3·1만세혁명을 일으킨 주역이 되었다. 이렇게 역사가 이어진다.

 

3·1혁명은 68년 뒤 6월 항쟁으로

올해는 3·1혁명 100주년으로 천도교를 비롯해 많은 사회단체들이 풍성하고 다양하게 기념식을 했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전 국민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한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만들어져 더욱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는 동력이 되었다.

3·1혁명은 과거 조선왕정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민(民)중심의 공화제로 바뀌는 혁명이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을 위해 여러 종교들이 함께 연대하는 최초의 역사적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부터 각인된 연대의 유전자로 인해 종교는 이후 100년 동안 한국사회 변혁의 중심주체가 되었다.

종교는 정신과 신념조직으로 한국사회 어느 단체보다 많은 시설이 있고 스님과 신부, 목사 등은 도덕적 권위를 갖는 사람들로서 신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기에 가능했다. 또한 종교라는 우산 속에 수많은 민주주의 역량을 보호할 수 있었고, 재정적 지원을 통해 활동을 지속하는 여건을 제공해 주었다. 3·1혁명을 시발로 60~70년대 종교간의 연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종교인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계승된다.

 

6월 항쟁은 30년 뒤 촛불혁명으로

며칠전 6·10 항쟁 32주년 기념식이 남영동 대공분실 터에서 개최되었다. 이곳은 김근태를 고문했고, 박종철을 죽게하여 6월 항쟁을 촉발하게 한 곳이다. 7층 건물의 5층에는 16개의 좁은 취조실이 있다. 방마다 변기와 욕조, 세면대가 있고 빛도 잘 안 들고 도망갈 수도 없는 30cm의 좁은 창문의 방들은 공포심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방에 들어서면서 여기서 고문당했을 수백 수천의 고통과 비명소리가 아직도 이 공간 어디쯤 남아 들리는 듯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 이후 30년 뒤, 2017년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과 전국의 도시 곳곳에 나서서 촛불혁명을 이루어 내었다.

거슬러 이 촛불혁명은 6월 항쟁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5·18민주항쟁, 부마항쟁이 없었다면, 4·19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고, 3·1운동은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3대 동학교주 손병희가 종교인의 힘을 조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국사회운동의 발전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유정길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더 거슬러 갈수도 있지만, 보은에서 있었던 북실전투의 수천명 동학군의 함성과 피울음이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의 공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6·25 당시 남북의 수많은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지금의 모든 문화적, 정치적 안락과 행복은 이전 선조들의 투쟁과 염원, 피땀어린 눈물과 죽음, 희원과 노력이 축적되어 이루어낸 것을 생각하면, 이들 선열들과 생명들 덕분에 누리는 삶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그져 염(念)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제사’라는 의식을 해오셨구나. 6월 10일에 남영동에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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