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잘 아는 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좋은 일을 한다고 했다. 워낙 오지랖 넓다보니 한 다리 건너서 나도 들어오라고도 했지만, 거기까지 끼는 건 무리다 싶었다. 페이스북에서 왁자지껄하게 잘 노는 걸 본지라 다행이다 싶었다. 사람이 모이면, 더 늘리고 싶고,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이 모여 뜻하지 않은 갈등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자주 겪어본 문제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모임은 큰 소란 없이 잘 되는 듯싶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본디 여러 사람 입을 타고 건너오는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 과장과 거짓, 그리고 억측이 뒤죽박죽 섞여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그 소문을 들으며 궁리해보았다. 잘 나가던 모임이 왜 암초를 만났을까, 하고 말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관용의 문제다. 뭇 모임을 만들려 들 때 이른바 요주의 인물을 만나게 마련이다. 일부가 모임에 그 사람을 포함하면 큰일 날 것처럼 군다. 그러면 누군가 반드시 변호를 한다. 그런 면이 일부 있을지 몰라도 과장된 경우고, 개인적인 인연으로 보건대 해찰 부릴 사람이 아니라고. 설왕설래하다 대체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운다. 누군가 일종의 ‘신원보증’을 했는데, 끝까지 반대하기 어려운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탈은 대체로 이런 쪽에서 난다. 본디 성정이 어딜 가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될 리 없다. 모난 것이 어찌 흉만 되겠는가. 정 맞아가며 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다. 단지 함께 할 적에 문제가 된다. 너는 왜 정 맞지 않냐고 시비 걸면 나머지는 마음에 부담이 간다. 그런저런 일이 쌓이면 갈등이 벌어진다. 안타까운 것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사람의 인내가 한계에 이른다는 점이다. 관용은 냉담으로 바뀐다. 서로 섭섭해하고 아쉬워하고 화낸다. 누군가 입에서 이럴 줄 알았다는 소리가 나면 파국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 성정도 생각도 다르지만 큰 뜻을 같이 한다면 다 받아들여야 하는가? 관용의 크기가 문제일 터다. 그런데 세상사를 지켜보면 마냥 관용을 베푸는 일은 없다. 차라리 관용에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고 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

전문성이 유난한 모임을 만들면 또 하나의 갈등이 있다. 전문집단만 모아야 할까, 아니면 우호집단도 포함해야 하는가를 두고 말이다. 모임을 주도하는 쪽은 대체로 우호집단을 받아들이려 한다. 깊이는 전문집단이, 넓이는 우호집단이 맡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래야 전문성을 강화하면서 영향력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집단이 충돌할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전문가집단이 주도해야 마땅하다고 여기게 되면, 우호집단은 우리가 ‘시다바리’냐, 라는 마음이 앙금처럼 쌓일 수도 있다. 아마추어적 열정만으로는 안 되는 법이다. 당연히, 전문성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두 영역이 갈마들어야 갇히지 않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나는 우호집단이 양보해야 한다고 여긴다. 자존심 다친 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모임의 기본색깔을 담당하는 쪽이 주도하고 우호집단은 다양한 색깔을 입히는 거라 보아야 마땅하다. 자존심 내세우면 될 일도 망가지게 되어 있다.

되돌아보니, 나도 이런저런 모임에 들기도 하고 내가 직접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껏 이어지는 인연도 있지만, 결국 박살 난 것도 있다. 무엇이 부족해 그리되었을까? 내 눈의 들보보다 남의 티끌을 더 문제시하는 자세, 잘 듣기보다 더 많이 말하려는 오만,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교만, 네 편 내 편 나누는 파벌의식. 결국 ‘내 안의 독재’를 몰아내지 않고서는 어떤 모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면 아예 뭉치지 말아야 하나? 내 경험에 빗대면 헤쳐 모이는 게 대안이다. 모임에서 안달복달하며 싸우지 말고 나와서 새로운 모임을 만드는 게 낫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이 글은 어떤 모임의 내분을 살피고 쓴 게 아니라, 소식을 듣고 떠올린 단상일 뿐이다. 어느 모임이든 더불어 좋은 일 하려다 상처받은 모든 이에게 평안함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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