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

[고양신문] “난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자유롭게 살다 죽을 거야. 보호받고 싶은 지 아닌지 내가 결정할 거야!”
갑자기 모두가 조용해진 건 녀석의 목소리가 커서만은 아니었다.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책을 읽고 ‘동물원이 필요한가?’ 토론을 할 때였다. 절반쯤은 동물을 보호하는 장치, 아이들과 동물이 친해지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고, 또 절반쯤은 자유롭지 못한 동물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다 한 아이가 “초원에서는 우리같이 어린 새끼들은 잡아먹힐 확률이 훨씬 커. 동물원에서 보호 받는 게 훨씬 오래 살 수 있어”라고 말하자, 동물원 반대를 주장하던 아이들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녀석이 소리친 거다. ‘내가 결정할 거라고.’

그림책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허정윤 글·고정순 그림. 킨더랜드)에서 사자 레오는 이렇게 말한다. ‘꿈은 단지 꿈일 뿐, 현실을 인정하세요. 차츰 삶의 지혜가 생겨납니다’, ‘희망은 없어도 밥은 챙겨 먹어요. 내가 없으면 또 다른 친구가 동물원에 오게 됩니다’, ‘연애만 하고 새끼는 낳지 마세요. 내 고통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에게 던지는 레오의 말은 절규에 가깝다.

그러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번도 동물들에게 물어본 일이 없다. ‘우리가 보호해줄 테니, 동물들과 인간이 친해지는 계기를 만들 수 있으니 동물원에서 살지 않을래?’ 무엇을 누구로부터 보호한다고 이야기하는 건지, 누구 입장에서 친해지는 계기를 만든다는 건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2015년 미국 동물원에서 퓨마가 탈출한다. 사실 퓨마는 사육사가 열어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퓨마가 ‘탈출’했다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하지만, 퓨마는 제 발로 자기 우리로 돌아온다.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삶에 익숙해진 퓨마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그도 자기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서 찾아보려 한다. ‘야후’를 사육하는 휴이넘(말)은 ‘야후’의 야만성 가운데 하나를 ‘거짓말’로 꼽는다. 야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이다. 걸리버는 그런 야후들을 ‘이성이 없는 짐승’이라 생각하고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걸리버는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야후(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동물원의 시작은 귀족들이 크고 신기한 동물들을 가두어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데 있었다. 그랬던 동물원은 근대에 와서 자본의 논리에 의해 확산됐다. 그때 인간들이 펼친 논리가 바로 ‘보호’과 ‘교육’이었다.

거짓말이다. ‘보호’가 이유였다면 좁은 철창 안에 가두거나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 야생성을 잃게 한다거나, 많은 종을 유지시키며 모두가 살아가기 힘든 사파리, 아이들이 함부로 만지거나 타고 놀게 만드는 형식의 동물원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다. ‘교육’이 이유였다면 동물을 포획할 때 어미를 죽이고 새끼를 데려오는 방식을 취하거나, 때리면서 사육시켜 보여주는 동물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는 서로를 속이고 동물들도 속인다.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그럴싸하게 포장할 논리를 만들어 낸다.

박미숙(책과 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사자 레오의 마지막 말은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이었다. 묻고 싶다. 다시 태어난 레오는 어떻게 할까? 배고프고 위험해도 넓은 초원을 달리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 안에서 살더라도 보호받고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가.
나에게도 묻는다. ‘넌 동물원에서 살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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