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 칼럼> 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고양신문] 라깡은 “욕망은 근원적으로 결핍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욕망하며 살아간다. 욕망하는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이 사라질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욕망하는 대상만 바뀔 뿐이다. 결국 욕망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죽음 외에는 없다.

명리학에서는 욕망을 ‘재성’이라 한다. 목의 욕망은 토, 화의 욕망은 금, 토의 욕망은 수, 금의 욕망은 목이고 수의 욕망은 화이다. 상생상극의 원리로 따지면 ‘극을 한다’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 내가 소유하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것이다.

재성을 얻기 위해서는 식상관을 사용해야 한다. 쉽게 말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식상관을 쓰지 않고 재성을 얻으려고 하면 탈이 나기 쉽다. 노력 없이 얻는 대가가 정상적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너무 많은 욕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운을 빼앗아 일간(본인의 기운)을 신약하게 만들어 버린다. 반대로 욕망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것을 해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의욕이 없다. 무엇이든 지나침과 부족함이 문제인 것이다.

욕망은 필요악이다.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는 삶이란 죽어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있어야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기고 그 의지는 에너지가 되어 힘을 준다. 그 에너지가 없을 경우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우울증이란 것은 사실 ‘무언가를 욕망할 것이 없다’와도 바꿀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필요‘악’이기 때문에 지나치면 자신이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극을 해야 하는데 욕망이 지나치면 욕망에게 반극을 당하게 된다.

버릴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이 욕망이란 녀석을 잘 다스리는 방법은 없을까? 우선 적절하면서도 건전한 욕망의 대상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백을 사는 것은 적절한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또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나은 상대를 고르는 것도 적절하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왜 ‘저것’ 또는 ‘저사람’을 욕망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 대상이 과연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으로는 욕망의 세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결국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강약조절이 아닐까.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덜어내고 부족하다 싶으면 보태면 되는 것인데, 말처럼 쉽다면 사는 것도 쉬울텐데...

명리적으로는 어떻게 풀 것인가? 우선 욕망이 지나칠 경우에는, 재성을 관성으로 설기(빼주는 것)시켜 관성으로 하여금 나를 통제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식상관(감성계)이 재성을 만들기 때문에 인성(사고계)으로 하여금 식상관을 조절해서 재성의 생성을 억제하는 방법도 한가지이다.

오경아 교환일기 대표

그렇다면 욕망이 낮아 생의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특징이 있다.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생에서 자신을 위해 성취한 것이 없는 인생이 되어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의 작은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이루고 나면 욕망의 대상을 바꾸는 식의 단계적 방법이 좋을 듯하다. 식상관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재성을 생해주는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욕망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불빛을 보면 달려들어 결국 타죽는 불나방을 보라.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 또한 불나방이 사는 에너지인걸 어쩌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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