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6월 23일자로 900만의 관람객수를 돌파했고, 전 세계 202개 국가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애국적 관람이 어느 정도 종료된 시점이라 생각하니, 이제는 말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관람한 사람들이 관람평을 상세히 쓰지 않는 묘한 동료애를 공유하고 있었던 듯하다. 황금종려상 대상작이라 그런 것인지, 스포일러를 하지 않는 것이 영화에 대한 예의라는 뒤늦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전의 영화와는 달리 유독 침묵의 전선이 오랫동안 형성되었다. 관객의 수준이 황금종려상만큼 높아진 것일까?

뭐, 이제 마음 놓고 스포일러를 자임하겠다는 놀부심보는 아니다. 그냥 나도 이 영화를 관람한 한 사람으로 영화를 보았던 심사를 소심하게 털어놓겠다는 말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글로벌 IT기업의 CEO인 박 사장(이선균) 집에 전원 백수로 지내던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신분과 자격을 속이고 전원 취업하면서 생긴 일들을 코미디스러운면서도 호러스럽게 그리고 있다. 발단은 대학생도 아니면서 명문대학생인 것처럼 위장취업한 장남 기우(최우석)가 자신의 집안 식구를 전원 취업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고부터다. 가족 전원을 취업시키려면 이전에 일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쫒아내야 하는데, 그 쫒아내는 방법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열하여 씁쓸함을 자아낸다. 멀쩡하게 일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의 삶은 일단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문제는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던 분의 남편이 지하실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쫓겨나지 못했다는 것, 그로 인해 사단이 벌어지면서 두 기생충(?) 집단의 사투극이 벌어지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이미 지났고, 개천에 사는 미꾸라지마저 생존투쟁을 벌어야하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그려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봉준호의 스토리와는 다른 스토리를 상상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전의 가정부 가족과 기택의 가족이 만나는 비극적 상봉의 순간에, 나는 갑자기 두 가족의 연대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두 기생충 집안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상했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서로의 비밀을 지키면서 평화롭게 이 큰 저택에서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이런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기대를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아, 내가 시대를 잘못 읽고 있구나. 어찌 가당키나 한 상상이란 말인가. 비극이 만천하에 상식이 된 사회에서 희극을 생각하다니. 고작 이런 시대착오적 상상을 하는 내가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의 현실과 나의 상상의 괴리를 절감하며 슬픔에 잠겼다.

심지어 개마저 식용에서 애완을 넘어 반려의 반열에 오른 마당에, 우리 인간은 왜 인간에서 원숭이로 전락했다가 벌레의 단계까지 추락하고 말았는가?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는 온갖 충들이라 불리는 인간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남자는 벌레가 되어 한남충이 되었고, 아기를 과보호하는 엄마는 맘충이 되었다. 만약에 이렇듯 벌레로 넘쳐나는 사회라면, 직장충, 입시충, 백수층, 노인충이란 말이 생겨나지 말란 법이란 없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은 모두 잠자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들이었다. 그런데,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은 돌연 잠자를 말 그대로 ‘벌레 보듯’ 한다. 그리고 이 벌레가 죽고 나서야 평화를 맞이한다는 슬픈 소설이 왜 이 영화와 겹치는지. 그러니까, 봉준호의 ‘기생충’은 현대판 『변신』이다. 둘 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나고 마는. 과연 우리는 벌레로 끝나야 하는가? 죽음 밖에는 길이 없는가? 이 오래된 질문이 나를 지금도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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