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 <고양신문 30년, 도시화 30년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홀트아동복지회를 만든 홀트 부부의 셋째 딸인 말리 홀트는 1956년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와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는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 63년 동안 고아와 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말리 홀트(향년 83세)는 지난 5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일산홀트복지타운 내에 홀트 부부의 묘와 나란히 자리 잡은 말리의 묘비명은 ‘말리 언니’였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필요,
홀트에서 자란 부부들 위한
아파트 간절히 소망했지만
끝내 못 이루고 떠나며 ‘유언’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중증장애인들과 한집에 살며
엄마로 언니로 직접 보살펴


[고양신문] ‘말리 언니’가 떠났다. 종교와 관계없이, 종교가 없었을지라도 말리 언니는 천국으로 갔을 거다. 매일 새벽 기도로 시작해 하루를 시작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녀에게 하나님을 뺀 천국을 이야기한다면 발끈 화를 냈을 게 분명하다. 그녀가 이 기사를 본다고 생각하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몇 년 전 병을 앓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준 사람에게도 병마는 찾아오는구나, 슬프기도 했지만 섭섭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녀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그러나 정작 말리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병을 그저 일상으로 받아들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녀에게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었던 게 분명하다.
8년 전 토요일 아침 말리 이사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아버지 해리 홀트와 어머니 버서 홀트가 살았던 말리의 집엔 장애인 세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300여 명에 이르는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일산홀트복지타운 내에서도 장애가 가장 심한 중증 장애인들이었다. 3살 때 홀트에 들어와 54살이 된 완복(뇌성마비)씨가 좋아하는 감자샐러드를 만들고 있던 말리 이사장은 점심시간이 되자 수희(당시 32세, 뇌성마비)씨의 밥을 챙겼다.

말리는 자신의 입으로 밥의 온기를 확인했고, 밥이 좀 많으면 그녀가 조금 먹고 넣어줬다. 밥숟가락은 수희씨 입에서 그녀의 입으로 넘나들었다.

장애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말리 언니’는 장애인들이 불편한 일에 대해서는 완고했다. 청소부터 식사, 화장실에서의 에티켓까지, 보육사들이 장애인들을 제대로 챙기고 있는 지 꼼꼼하게 살피며 맘에 들지 않으면 잘 할 때까지 잔소리를 했다. 장애인이라고 함부로 대할 때는 무섭게 화를 냈다. 직원들에겐 깐깐한 시어머니였다. 새로 온 보육사들은 말리의 방에서 간호와 보살핌에 대해 실습을 받은 후 다른 방으로 갈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조금 한가한 시간에 말리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세 평 남짓한 작은 방엔 낡은 옷장과 오래된 책상 하나가 있었다. 침대도 없었고 두툼한 요가 깔려있었다. 국내 최대의 복지기관 중 하나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의 방치고는 지나치리만큼 검소했다. 무언가 스토리를 끌어내려고 머리를 쓰던 나는 우선 낡은 옷장에 대한 사연을 물었다. 말리는 “나도 오래됐어요” 한마디만 던지며 웃는다. 인터뷰 내내 그랬다. 어떤 것도 미화시키지 않았고, 어떤 일도 평범한 일상으로 내려놓았다. 말리에게 장애인을 돌보는 일은 그저 엄마가 자식을 돌보는 일상이었다.

말리 홀트 여사의 소녀시절 모습.

말리는 5년 전부터 아팠다. 혈액암으로 시작된 병은 2년 전 폐암으로 번졌다. 말리는 몸이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장애인들을 챙겼다. 말리가 생전에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일은 병원에 있는 홀트 가족을 챙기는 일이었다. 홀트에 살다가 병이 나거나, 요양 치료가 불가피한 장애인들은 외부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말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들을 꼭 찾았다. 열 명 가까이 되는 장애인들을 찾아 엄마로서 따뜻하게 안아줬고, 욕창은 없는지 살폈다. 욕창이 걸리면 매주 가서 거즈를 떼어내고 상처 부위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간호사들은 절대 떼지 말라고 했지만 거침없이 떼고 치료가 불만족스러우면 개선을 요구했다.

말리는 ‘가족이 없는 고아라고 하면 함부로 대한다고, 엄마가 있다고 언니가 있다고 확인해줘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준다’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말리에게 가족은 처음이자 끝이었다. 홀트 부부가 전쟁 직후 한국으로 건너와 구호사업을 시작할 때도 가족을 만들어주는 일이 목표였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거부였던 해리 홀트 부부에겐 8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4명은 입양자녀였다. 한국 전쟁 직후 고아들의 처참한 현실을 알게 된 홀트부부는 전쟁고아를 입양하기 시작했다. 8명을 입양했는데, 계속 입양신청이 들어오자 아예 한국으로 건너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으로 고아를 입양하는 일을 시작했다. 홀트부부는 ‘가족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조건’이라고 여겼다. 재산을 다 팔아서 구호사업을 시작했고, 일산홀트복지타운과 홀트학교, 홀트복지재단을 만들었다.

부모님의 일을 평생 이어온 말리 홀트 이사장은 스물두 살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어머니 버다 홀트에게 한국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 19살 소녀는 간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왔고 평생을 고아와 장애인을 위해 살았다.

그녀가 가장 열렬하게 원했던 일 역시 가족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홀트타운에서 함께 자라며 사랑하게 되고 결혼한 부부가 20쌍, 홀트에서 자라 다른 장애인과 결혼한 부부가 20쌍, 모두 40쌍의 장애인 부부가 평범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오히려 걱정이 많은 직원들에게 말리는 항상 아무 걱정 말라고, 우리 아이들도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암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말리 이사장을 몇 번 보았다. 홀트학교 졸업식 때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축사했다. “여러분들이 졸업해도 홀트학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린 든든한 가족이에요.”

말리 이사장은 8년 전 인터뷰 했던 고양신문을 기억하고 만날 때마다 한 가지 이야기만 했다. 장애인 부부들이 살기 힘들다, 장애인 부부가 아이를 키우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장애인 아파트가 꼭 지어졌으면 한다고. 땅은 홀트에서 내놓을 수 있는데, 허가가 안 난다고 했다. 말리 이사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망했던 장애인 아파트를 끝내 못 짓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녀에게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울타리를 가볍게 넘나든다. 핏줄의 인연이 아니라 연민과 보살핌, 사랑의 공동체이다. 홀트에서 입양된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다시 찾아올 때, 홀트에서 자라 결혼한 부부가 손자손녀를 데리고 올 때,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핏줄의 가족보다 진한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말리 홀트 여사.

그녀와 오랜 시간을 보낸 이창신 국장(일산홀트요양원)은 “돌아가시기 하루 전 병원을 찾았을 때, 말리 이사장이 ‘아이들이 힘들어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힘겹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이 국장은 장애인 가족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정작 그녀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 평생을 한국의 고아와 장애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삶이 미화되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던 파란 눈의 아름다운 한국인 말리 홀트는 소박하게 평화롭게 떠났다. 말리 이사장의 장례식을 찾은 동생 린다 홀트는 “언니가 고아와 장애인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홀트일산복지타운에 있는 홀트 부부의 묘 옆에 나란히 묻힌 말리 이사장의 묘비명은 ‘말리 언니’였다. 그녀의 이웃, 고양에 처음으로 장애인 부부를 위한 아파트가 지어진다면 어떨까, 말리 언니가 춤을 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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