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30년, 도시화 30년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이태원 건설기술연구원 박사

▲ 27일 이태원 박사의 연구실(일산서구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박사의 연구실은 건물들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득하다.


난방비 절감시스템 개발하고도, 상용화 못하는 사회구조에 절망
소비자가 정보·기술 공유하는, 혁신 산업플랫폼 상용화 연구
자문비 등 월급 외 수입 기부, 10년 넘게 ‘천사의집’ 식사봉사
공유경제 연구하며 봉사의 삶 실천하는 '착한 박사님'

 

[고양신문] “저는 소비자의 대리인입니다. 저의 연구가 특권층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기술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판단하려면 자기분야의 일만 너무 열심히 해선 안돼요.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해요. 시야가 넓어지면 새로운 연구영역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인 이태원(59세) 박사.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특권층이 아닌 소시민(그의 표현에 따르면 ‘소비자’)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공학 박사이자 지역 봉사자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냉철한 이공계 박사다. 그러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활동해온 봉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부터는 다양한 인문학 서적에 빠져들었고 이후엔 자신의 연구분야인 ‘(지식공유)융복합 기술’이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앞으로의 기술은 돈 있는 자본가나 권력층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소비자들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생각을 다양한 책을 통해 더 공고히 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삶을 굳이 두 가지로 분리하자면 봉사자의 삶과 연구자의 삶으로 나눌 수 있다. 두 가지 삶 모두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그의 삶의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거창한 뜻을 품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던 건 아니다. 마음속에 담긴 진심들이 하나 둘 표출되면서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20여 년 전 그는 돈 몇 백만원을 들고 기부할 곳을 찾아 ‘고양시자원봉사센터’라는 곳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소개해 준 장애인시설(고양 천사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이후 이 시설은 그의 삶의 일부가 돼버렸다. 매달 한 번씩 40인분의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보고 요리와 설거지까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내는 ‘바보처럼 착한 사람’. 그는 얼마 전 치매로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 조의금 5000만원을 모두 기부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익을 위한 그의 삶의 태도는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와 기업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이 연구가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그에겐 항상 중요했다. 그는 15년간의 ‘아파트 난방비’의 불합리성에 대한 연구로 꽤나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의 난방비 절감 연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만큼 난방비와 관련해서는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소비자가 아닌 지역난방공사를 위한 연구였다면 그가 지금처럼 유명세를 타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에게도 좌절이 있었다. 소비자에게 유리한 기술을 개발했음에도 그것이 실제로 상용화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좋은 연구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과, 그것을 상용화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였던 것. 15년간 연구해온 좋은 결과물에 환호하면서도 동시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 시기에 그가 의지했던 것은 오직 독서였다. 경제학, 인문학, 철학, 미래학 등 인류문명에 대한 다양한 책 수백 권을 탐독하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거기서 희망도 얻었다.

그가 다시 일어서 도전하고 있는 연구분야는 ‘소비자 맞춤형 융복합기술’이다. 대량생산 없이 일반인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쉽게 구매해 조립을 맡길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해 내는 것이 그의 연구과제다. 지난 27일 건설기술연구원(일산서구) 연구실을 찾아 그의 삶의 이력에 대해 들었다.

 

봉사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다.

우리 같은 연구자들은 월급 말고도 대가를 받는 게 조금씩 있다. 예를 들어 자문비, 심사비, 강연료 등이다. 하지만 나는 월급 이외의 돈을 내가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젊었을 때부터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 돈을 따로 관리해 왔는데, 그 게 몇 백만원이 되자 이걸 기부하기로 했다. 어디에 기부하려고 깊이 생각한 건 아니다. 단지 믿을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그곳이 ‘고양시자원봉사센터’였다. 돈만 드리고 왔는데, 센터 직원이 기부할 시설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천사의 집’이다. 그땐 치매노인들이 많이 계셨는데 시설이 너무 낙후돼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매달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할머니들의 모습이 머리에 계속 맴돌아서 다음해 설날에 선물을 사들고 혼자 방문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시설 원장님이 부탁이 하나 있다며 ‘설거지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평일엔 봉사자들이 오지만 명절엔 방문자가 없어서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 얘길 듣고 시멘트 바닥에 앉아 광주리 3개 분량 설거지를 1시간가량 했다. 영하의 날씨에, 끝나고 나니 바지는 다 젖어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 보니, 그런 설거지를 한 달에 90번은 누군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다시 차를 돌려 원장님께 이렇게 말했다. “한 달 설거지 90번 중 앞으로 제가 한 번은 할게요. 언제 하면 되나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매달 한 번 이상 지금까지 방문하고 있다.
 

▲ 이태원 박사의 연구실 책상 주변모습. 책상 위는 연구서와 논문들로 가득하다. 한쪽에는 간이침대가 놓여있고, 침대 위는 여러가지 서류들로 한가득이다. 취미로 검도를 꾸준히 해온 이 박사, 등 뒤로 그의 목검도 보인다.


난방비 연구는 왜 하게 됐나.

정확히 얘기하면 열효율에 관한 연구다. 공동주택에서 난방 요금체계가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돈은 소비자가 내는데 연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맡긴다.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난방에 대한 연구는 이미 다 끝났다라고 선배들이 말렸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연구를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뛰어들었다. 소비자 입장에선 전기와 달리 ‘난방비는 아끼면 아낄수록 이상하게 단가가 더 올라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거다. 실제로 그런 기술적 오류가 많기 때문이다. 고양시와 같은 지역난방의 경우 계량기를 ‘열량계’가 아닌 ‘유량계’로 쓰는 곳이 많은 데 이게 역누진이 발생하는 대표적 원인이다. 원인을 알면서도 아직까지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술적으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연구는 성공적이었고, 우리 기술로 난방비를 약 15% 줄일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게 9시 뉴스 헤드라인에 나오면서 명성도 얻게 됐다. 과학분야 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우리의 온돌방식은 건물 자체(바닥)를 데우는 것이고 서양은 공기를 데우는 방식이다. 난방의 원리가 완전히 다름에도 우리는 지금도 서구식 제어방식을 쓰고 있다. 그 제어방식을 우리식으로 바꾸면 비용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이 연구의 핵심이었다.

문제는 이 기술이 소비자에게 가지 못했다는 거다. 난방회사에 기술 이전까지 했는데, 그 회사가 외부환경에 의해 부도가 났다. 그리고 그 기술은 지금까지도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알게 됐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소비자에게 가는 데는 큰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공학 박사들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의기소침하며 슬럼프에 빠졌다.


슬럼프 기간 어떻게 지냈나.  

2~3년간 좌절의 시간이 나에게는 성장의 힘이 됐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이상하게도 전공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연휴 때는 10권씩 사서 읽었다. 지금도 지역서점인 한양문고의 단골이다. 몇 년간 500~600권의 책을 읽은 것 같다. 주로 마음을 움직였던 책이 철학과 인류학, 특히 미래학 책이었다. ‘유발 하라리’와 ‘엘빈 토플러’의 책이 나에겐 더욱 특별한 면이 있다. 석학들이 예언한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인류가 『호모 데우스』와 같은 신이 된 인간(초인류)의 노예로 살게 될 것이란 예측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금도 소비자들은 자본과 권력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나.


슬럼프를 겪고 나서 새로운 연구 분야에 매달리고 있다. 무엇인가.

전공을 벗어나 소위 융복합 연구를 하고 있다. 기술만을 들여다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분야다. 이 기술이 ‘누구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만 융복합 연구의 방향과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융복합 연구는 나에게 잘 맞는 분야다. 관점을 바꾸니 새로운 연구과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연구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해 달라.

초인류의 출연을 막고 우리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연구다(웃음). 인류가 초인류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선 자본과 권력과 정보의 독식을 막아야 한다. 자본과 정보를 함께 누리기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 우리의 연구과제다. 산업생태계를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혁신적인 플랫폼을 상용화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면 지금의 자동차는 대량생산라인이 구축돼 있어야 생산이 쉽다. 즉 대기업만이 생산에 유리하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한 플랫폼을 이용하면 개별 소비자들이 각각 원하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를 선택해 맞춤형 자동차로 조립할 수 있다. 일반인들도 쉽게 선택해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쉬운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개발 소프트웨어가 곧 플랫폼이다. 자동차를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이런 플랫폼은 다양한 소비재, 또는 건물자동화시스템 등에 적용될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지식공유시스템을 기반으로 일반인도 전문가들의 영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근 어머니 장례식 조의금을 기부했다. 기부에 대한 소신이 궁금하다.

내가 쓸 돈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대학을 나와 계속 공부를 하고 건설기술연구원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의 역할도 있었지만, 사회가 나를 성장시켜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받은 것은 돌려주고 싶다. 월급 외에 받은 모든 돈은 애초부터 기부할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기부에 대한 계획이 더 있다. 기금을 조성해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에 활용되는 방안들도 고민 중이다.


흥미를 끄는 연구 분야가 있나.

치매 어머니를 모시면서 복지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복지예산은 점점 늘어나 국가 예산의 3분의 1이나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효율적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도움이 더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쓰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별적 복지의 한계는 선별과정에서 그 비용이 더 든다는 점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ICT(정보통신기술)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디바이스를 구축해 패트롤 업체를 가동시키면 된다. 말은 쉽지만 새로운 도전이다. 효율적으로 복지예산을 분배하는 것과 동시에 복지산업을 육성시키는 새로운 시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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