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칼럼

오경아 교환일기 대표

[고양신문] 나에게 명리학 강의를 듣는 젊은 여성분이 있다. 올 초에 사주를 보러 갔는데 두 군데서나 수술수나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다고 미리 몸에 칼을 대라고 했단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냐고 물었다. 찾아보니 아주 기초적인 ‘해’의 역할을 말해준 듯하다.

믿고 안 믿고의 차이겠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찜찜해지는 게 사실이다. 사실 나는 상담을 할 때 그런 것은 잘 말해주지 않는 편이다. 아니 중점을 거기에 두지 않는다는 게 맞겠다. 명리를 처음 배울 때의 목적도 내 인생을 미리 알아서 잘 대처하자가 아닌 내가 모르는 이 세상에 어떤 것이 미리 정해져 있어 내가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의지대로 사는 건지 알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리라.

나의 경우겠지만 물리적 상황보다는 늘 내 마음이 날 힘들게 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남들보다 예민한 구석이 많았고 늘 부정적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탓이었던 것도 같다. 일상의 소소한 것에 대한 즐거움도 잘 못 느끼는 편이었고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 외에는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었다.

다른 인문학 공부를 하던 끝자락에 명리학을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명리학을 접한 사람들의 특징은 거두절미하고 결과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용하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결과는 원인을 기반으로 하고 그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천재지변과 같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도 많기야 하다. 그런 일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사건사고이다.

피해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나의 성격을 변화시켜서 흉한 것을 길한 쪽으로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나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명리학을 사용해야지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거나 힘든 일을 피해보려고 명리학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세상에 정해진 것은 사실 없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있고 어떤 선택이든 자신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인 것이다.

필자는 젊은 여성분들과의 상담을 특히 좋아한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딸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조금 더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기도 하다. 자신이 서야 일이든 사랑이든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내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주제 넘는 소리 아닌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두 사람의 10년 후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단점에 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쓴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변화는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칭찬이 더 듣기 좋은 법이긴 하다. 또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 않던가. 진정한 칭찬인지 입에 발린 소린지를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판단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칭찬이 약이지만, 반대 경우에는 독이 될 수 있어서 하는 소리다.

명리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오는 분들에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는 ‘도사’보다는 ‘카운셀러’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결국 타인에 대한 이해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나의 ‘명리학을 기반으로 한 긍정 에너지’를 공유하고 싶다. 물론 쓰디 쓴 ‘지적질’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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