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자유농장 이웃 밭에는 아주 오랜 세월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온 팔십오 세의 할아버지가 있다. 그 할아버지는 새로 이사 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우리들을 흥미로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우리들은 행여 그 할아버지가 밑도 끝도 없이 일반적인 농법을 강요하며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다. 만에 하나 그 할아버지가 무슨 놈의 농사를 저 따위로 짓느냐면서 노발대발 텃세를 부리기라도 한다면 우리들은 뒷목을 잡아가며 괴로워하다가 새로운 농장을 찾아서 떠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여느 노인들과 달리 젊은 사람들이 아주 농사를 제대로 짓는다면서 반가워했는데 우리들 입장에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옆 밭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꽤 사이좋게 지냈다.

그런데 유월로 접어들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우리들은 늘 해오던 대로 밭에서 자란 풀들을 뽑아서 두둑과 고랑에 멀칭을 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우리 밭과 할아버지 밭의 경계가 되는 고랑에 풀이 덮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할아버지는 당장 풀을 치우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할아버지는 고랑은 비가 오면 물이 빠져나가는 물길인데 그걸 막아놓으면 그 물이 다 어디로 가느냐면서 도대체 생각이 있느니 없느니 호통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들은 꽤나 억울한 입장이었지만 불문곡직 정중하게 거듭 사과를 한 뒤 경계가 되는 고랑의 풀을 싹 거둬냈다. 그러나 화가 날 대로 난 할아버지는 다음날부터 안면몰수 인사도 받지 않았다.

잘 지내오던 할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고 나니 텃밭에 있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할아버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우선은 할아버지가 인사를 받든 말든 전보다 더 큰소리로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의 농막 앞에 수확물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끝내 인사도 수확물도 받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할아버지와 함께 밭에 나와서 일하던 할머니가 한낮 땡볕에 잔뜩 수확한 콩을 혼자서 어칠비칠 들고 가고 있었다. 때마침 일을 마치고 차를 끌고 나오던 나는 극구 사양하는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 드렸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콩을 나누어주었다.

할아버지의 태도가 바뀐 건 그 다음날부터였다. 할아버지는 전처럼 웃는 얼굴로 우리들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우리들은 마음 편하게 농사를 짓게 되었다.

요즘 내 주변엔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나 귀농이나 귀촌은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다. 실제로 귀농이나 귀촌을 시도했다가 소위 텃세를 견디지 못하고 도시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 시골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은 인심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와 시골의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옆 밭 할아버지와 우리들이 겪었던 일화처럼 아주 작은 생각이나 문화의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때 잠시 나를 내려놓고 낯선 세계로 다가가기 위한 마음을 다진다면 낯선 세계 역시 나를 향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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