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창간 12주년 … 기념 서광수 선생 도예전

▲‘서광수선생 초대전 … 23일부터 28일까지 뉴코아백화점



한국 도예계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서광수 선생은 국내에서 보다 일본에서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미 20여회에 이르는 일본 초대전을 치러 현지의 도예업계와 소장가들로 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서광수 선생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장작가마로 작품을 빚는다.




수백점을 구워도 겨우 5-6점을 건져낸다는 전통 장작가마에 40여년째 예술혼을 태우고 있는 서광수 선생은 아무리 오랜 시간 공들여 빚은 작품이라도 가마가 받아들이지 않은면 단호하게 버린다. 고비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남은 작품들은 그의 이름과 함께 세계 각국의 도예 소장가들에게 보내지는데 서광수 선생은 작품이 팔리는 기쁨도 크지만 산고 끝에 탄생한 자신의 분신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 또한 적잖다고 한다.

한국 도예의 산지인 이천에 자리잡고 있는 선생의 작업실 ‘한도요’마당에는 집채만큼 쌓아 올린 장작더미들이 가득하다. 가마에 넣을 나무를 준비하고 말리는 일부터 흙을 빚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굽는 일까지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전통 도자기의 산지라는 이천에도 전통 가마를 유지하고 있는 작업실은 단 2곳 뿐이다. 수백개의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작품들과 한달에 두서너번 장작을 지펴 몇점씩 생산해 내는 작품이 다른 것은 시간과 정성, 그 때문만은 아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며 한국 도예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아름다운 소신이 바로 예술적 가치를 한단계 올려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서광수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마터로 들어가 버렸다. 가마터 주변에서 나고 자라 어릴적부터 ‘흙대장’이 되겠다고 결심한 어린 소년은 그 뒤로 40여년 한길을 걸어 한국을 대표하는 ‘흙대장’이 됐다.

“흙덩이를 물레위에 올려놓고 물레를 발로 툭툭 치면 여러 형태의 그릇이 쏟아져 나오는데 얼마나 신기하고 신이 나는지… 졸업만 해봐라하고 벼르고 있다 가마터로 줄행랑을 쳤지요”
말없는 얼굴엔 한치의 후회도 없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한가지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도인이 된다는 말이 있듯 서광수 선생은 예술가와 도인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서광수 선생은 청자와 백자, 진사, 분청 등 도자기의 전 장르를 다 빚을 줄 아는 장인이다.
그중에서도 골동품 맛에 흠뻑 젖은 무지백자는 국내 전문가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극찬을 받고 있다. 선생의 작품은 조선 시대의 것 그대로다.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 넉넉함과 부드러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색채 …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조화는 선생의 작품이 왜 그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단숨에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옛날 것들을 보면 그때 시절의 문화와 생활환경이 딱 보이지. 그리고 그때 시절 도공의 마음도 담박 알지. 한마디로 신비롭지. 흙과 불과 도공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지.”

선생은 옛방식 그대로 자신이 배운 것과 터득한 방법에 따라 흙을 만들고 유약을 만든다.
흙의 배합에서부터 성형, 유약과 그림, 조각과 가마를 지피는 일까지 모두 혼자서 할 줄 알고 혼자서 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누가 모방할 수도 없고 그 자신이라해도 똑같은 작품을 또 만들어 낼 수 없다. 흙을 빚어 장작 가마에 넣는 순간 사람의 의지는 떠나고 불이 마지막 빛깔을 장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근원의 선을 구하는 마음으로, 겸허한 조선도공의 모습으로 현대적인 것들과 저만치 떨어져 있는 선생의 삶은 그 자체가 창작의 연속인 듯 하다.


▲서광수선생은…
14세때 토정 홍재균 선생의 수제자로 성장, 지순탁가마에서 청자와 백자 수업을 받았다. 이후 이후락씨의 스카우트로 경기도 광주에 ‘도평요’를 창설, 공장장 등을 거치고 10여년 전에 이천에 가마를 차렸다. 국내 전시회는 물론 일본 전시회에 다수 참여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 전통 도예계를 대표하는 작가로 ‘한국 도예의 자존심’으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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