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핑 더 페이스> (에드워드 노튼 감독, 2000, 미국)

[고양신문]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이 존재할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람 중에 자신이 아직 싱글인 이유가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다). 과연 우리는 딱 맞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가 기적과도 같이 나에게 찾아와 줄까?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영화 ‘키핑 더 페이스’(믿음 지키기)는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유대교를 믿는 제이크, 가톨릭 신자인 브라이언, 그리고 그들의 불쌍했던 중학교 시절을 구원해준 친구 애나 라일리가 살고 있다. 그들은 뭉치면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내지만, 갑자기 애나의 아버지가 뉴욕에서 LA로 전근 가시는 바람에 눈물의 이별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그래도 세 친구는 몇 년간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지만 결국 LA로 떠난 애나의 존재는 뉴욕에 남은 두 친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멋진 어른으로 완벽 변신한 애나는 뉴욕으로 지사 발령을 받아 돌아오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세 친구는 재결합의 순간부터 미묘한 감정선을 타기 시작 한다.
 

영화 <키핑 더 페이스>의 세 주인공. 사진 왼쪽부터 벤 스틸러(제이크 역), 제나 앨프만(애나 역), 감독 겸 주연 에드워드 노튼(브라이언 역).

 
맨해튼에 위치한 유대인 회당에서 최연소 랍비로 활동하고 있는 제이크는 잘생기고 웃기면서 설교도 잘하는, 그러니까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나가는 랍비이다.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랍비에게 존재하는 사랑을 만나는 장애물이라면 그의 파트너로 유태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할 상대로 유태인을 찾아야 하는 그들의 전통은 매우 강력하고 그것은 비단 개인의 일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일이다.

또 한 명의 친구 브라이언은 어렸을 때부터 신부로서의 소명을 소중하게 키워 결국 착한 신부로 살고 있다. 지금도 그 소명에 걸맞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데 신부로서의 소명 중 하나는 자신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의 길로 가는 브라이언 앞에 놓인 장애물은 바로 소명이다. 한 명은 가족과 전통 다른 한 명은 소명이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절친이었던 제이크와 브라이언 앞에 나타난 친구 애나는 두 사람에게 강력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결국 세 사람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만다. 세 사람의 사랑과 우정은 지켜질 수 있을까?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배우로 열연했던 에드워드 노튼(브라이언 신부)은 영화의 제목을 ‘키핑 더 페이스’라고 했다. 번역하면 ‘믿음을 지키는 것’ 정도가 될 텐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왜 ‘믿음 지키기’를 제목으로 내세운 것일까? 영화를 보니 감독이 사랑의 속성을 나름대로 꿰뚫어 봤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있는 타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나도 상대를 사랑하지만, 상대도 나를 사랑하고 신뢰해야 사랑의 관계가 성립한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믿음 안에서 그 관계는 성장하게 된다. 영화에서 제이크나 브라이언은 모두 사랑하는 상대를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상대를 완전히 믿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오히려 자신에게 확실히 보이는 것들을 신뢰한다. 그것들은 제이크와 브라이언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준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이크에게는 가족과 전통이었고 브라이언에게는 소명이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이 그 자리에 있도록 길잡이가 돼준 전통과 소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그것에 의지하고 있는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믿고 나아갈 때 비로소 사랑을 찾게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사랑 찾기의 과정이 바로 믿음 지키기(keeping the faith)로 대변되는 것이다.

강도영 빅퍼즐 문화연구소 소장.

사랑에 대해서 제이크는 가족과 종교적 전통을, 브라이언은 자신과의 서약을 두고 고민했다면 애나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끝까지 붙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나에게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랑의 길이었기 때문에 두려운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결국,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외적인 전통도, 내적인 소명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신을 내어줄 수도 없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에게 맞는 사람,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헤매고 있다. 사랑을 찾는 여정은 나를 내려놓고 사랑하는 상대방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찾고 있다면 아마도 자신이 찾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사랑을 찾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나를 내어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나에게 딱 맞는 사랑을 찾는 것이라는 놀라운 진리는 영화 한 편으로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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