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결 따라 역사의 흔적 따라, 고양의 생태하천 기행(9) - 장월평천 상

한강 제방 쌓기 전엔 갈대 무성
수리시설 후 비옥한 옥토 변모

하천변 노루뫼 장산마을 번성
송포호미걸이·장산두레패 등
고양 전통농경문화의 발원지

 

[고양신문] 시인 정지용은 ‘향수’에서 고향을 추억하는 첫 문장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고 적고 있다. 농사에 기대어 살았던 옛사람들에게 들녘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는 가장 중요한 삶의 근간이었다. 고양의 하천 중 이러한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하천을 꼽으라면 단연 장월평천(獐越平川)이다. 장월평천은 고양땅 최대의 곡창지대인 송포평야의 서쪽 끝을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휘돌아 나간다

 

고봉산 발원, 구산배수펌프장까지

장월평천의 발원지는 고양의 고(高)자가 비롯된 고봉산(高峰山)이다. 고봉산 아래 중산·탄현마을에서 모아진 물줄기가 덕이동에서 한산천과 만나고, 송포동을 지나 파주 동패리에서 흘러내려온 가좌천(加佐川)과 만나 장월벌을 가로지른다. 이어 지도에서 보듯 가좌동을 지나 법곳동에서 서쪽을 향해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한강과 나란히 달리다 구산동을 거쳐 파주 산남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인 구산배수펌프장에 다다라 한강으로 유입된다. 이처럼 탄현지구와 덕이지구, 가좌마을과 대화마을 등 대규모 택지개발지역 사이를 농경지를 따라 흐르는 하천이 장월평천이다.

일산신도시에서 장월평천을 찾아가려면 대화동 고양종합운동장 사거리에서 가좌마을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가면 된다. 그러면 3개의 하천과 교차하는 다리를 차례로 만나는데, 첫 번째가 대화천이고 다음으로 장월평천과 가좌천이 연이어 나타난다. 하천 양쪽의 좁은 둑방길을 요령껏 따라가며 1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다리를 차례로 지나치다 보면 종점인 구산동까지 송포 들녘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한강물 넘나들던 드넓은 갈대밭

대개의 하천은 구불구불 굽이를 틀어가며 흐르게 마련이지만, 장월평천은 중간에 크게 꺾이는 지점을 제외하면 거의 일직선으로 흐른다. 지난호에 살펴본 대장천처럼, 장월평천 역시 1920년대 후반 한강 하구에 제방(일명 대보뚝)이 쌓인 후 저지대의 물골이 정리되며 지금의 모양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보뚝이 만들어지기 이전 송포평야 일대는 강물이 수시로 범람하는 저지대였다. 서해바다 조수에 따라 갯골로 큰물이 들어올 때면 장산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 정박하던 나루터도 있었다 한다.

농사를 짓기 힘든 한강변 드넓은 벌판은 갈대의 영토였다. 덕분에 해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갈대를 베어 한양도성에 건축자재로 납품을 하는 일을 맡아 하던 관청과 관리가 상주하기도 했다.

송포평야 한가운데 자리한 노루뫼와 장산마을.

마을을 든든히 지켜준 노루뫼

송포 들녘을 주름잡던 또 하나의 주인공은 갈대밭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고라니들이었다. 장월평천(獐越平川)이라는 이름부터가 노루(獐)가 개울을 뛰어넘어(越)다니는 들판(平)의 하천(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노루는 사슴종류 중 물가를 가장 좋아해 물사슴이라 불리는 고라니를 말한다.

평소 갈대밭을 보금자리 삼아 놀던 고라니들은 홍수가 나면 들판 한가운데 솟은 작은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언덕 이름이 장산(獐山, 노루뫼)이 됐다. 고라니들에 대한 옛사람들의 기억은 일산신도시 지역에도 장항(獐項, 노루목)동, 장항습지, 노루목극장 등의 이름을 곳곳에 남겼다.

가좌천을 만나 수량을 불린 장월평천 중류.

대부분의 지역이 침수에 취약했던 탓에 비교적 지대가 높았던 장산 부근은 인근에서 가장 큰 동네가 됐다. 사실 해발 50m에 불과한 장산은 산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소박한 높이지만, 장산마을 사람들에게는 어느 산보다도 든든한 존재였다. 마을 사람들은 장산을 영험한 산으로 모시며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꺾지 않았고, 3년에 한번 장산 도당나무 아래서 도당굿을 열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한다. 물에 잠기지 않는 땅 한 뼘이 소중했던 옛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밥맛 좋은 송포쌀 길러내는 곡창지대

제방이 만들어지고 수리시설이 정비된 후, 세월이 흐르며 매립지의 소금기도 씻겨나가 지금은 송포평야가 밥맛 좋은 쌀을 만들어내는 옥토가 됐다. 자연히 장월평천은 농업용 보를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했다. 장월평천 주변의 송포미곡처리장, 고양쌀연구회 도정공장 등은 송포평야의 곡창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시설들이다. 하지만 옛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비옥한 농경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아 농업의 위축과 택지개발이라는 위협에 노출되는 신세가 됐다. 장월평천 역시 이제는 더 이상 농업용수 공급 기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촘촘히 이어진 농수로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장월평천이 감싸고 도는 송포평야는 고양지역 최대의 곡창지대다.

가좌천엔 정말 가재가 많았을까.

장월평천의 가장 큰 지천인 가좌천의 이름 뜻도 잠시 살펴보자. 대부분의 자료에는 옛부터 가재가 많아 ‘가재울’이라 불렀던 이름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가좌로 표기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색다른 설명도 있다. 우리말 땅이름을 설명한 책을 보면, 전국에 산재하는 수많은 가좌동은 사실 물가쪽의 마을을 말하는 ‘가새울’이 변한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기자 역시 이 견해에 한 표를 던진다. 가재는 계곡 상류의 골짜기에 사는 생물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가좌천 어디에도 가재가 살만해보이진 않는다. 고양시 뿐 아니라 서울 가좌동, 인천 가좌동 역시 가재가 살만한 지형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물가의 마을 ‘가새울’에 어울린다.

최근 가좌천 둑방을 따라 일산서구에서 소박한 산책로를 조성했다. 아파트가 들어선 가좌동과 덕이동 주민들이 차량에 방해를 받지 않고 하천변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늘어날 것 같다.

구산배수펌프장을 향해 흐르는 장월평천 하류.

면면히 이어오는 옛마을의 전통문화

장월평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유형의 문화재는 천연기념물 60호 송포 백송(松浦 白松)이 거의 유일하다. 고양시가 회백색 수피의 희귀종 소나무 백송을 시목으로 삼은 것도 송포 백송 때문이다. 나이가 250살로 추정되는 송포 백송은 조선 선조 때 중국 사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나무라는 유래를 안고 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

장월평천 주변에는 동촌, 서촌, 동촌, 뱀개, 멱절, 양촌, 용구재, 거그뫼(구산), 도여지 등 재미난 유래를 가진 마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유형의 문화재보다 훨씬 풍성한 무형의 전통문화가 산재해 있다.

고양을 대표하는 민속놀이인 송포호미걸이(경기도 무형문화재 22호)는 한해 농사를 갈무리한 후 호미를 기름으로 닦아 잘 걸어두는데서 비롯된, 자연의 순리에 순응했던 옛사람들의 흥취가 깃든 들소리다. 용구재마을에서는 마을에 사는 커다란 이무기가 용이 되지 못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용구재 이무기제라는 민속놀이를 재현하기도 했다.

고양상여회다지소리는 가문과 마을이 함께 힘을 모았던 전통 예법을 계승한 장례의식이고, 유서 깊은 장산마을 두레패 역시 새마을운동과 함께 명맥이 끊어질 뻔했던 위기를 극복하고 2011년 재결성해 힘찬 가락을 이어오고 있다.

한강제방이 정비된 후 생겼다가 사라진 마을문화로는 장월평천 물막이가 있다. 일명 동막이로도 불리는 이 행사는 장월평천에 물이 가장 높게 밀려들어왔을 때 보를 막아 겨우내 가둬 두었다가 봄 농사를 시작할 때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행해졌다. 물막이를 하는 날이면 법곳동의 서촌과 도촌, 구산동의 노루뫼, 장월, 중촌, 향정, 인접 파주 산남리 등 7개 마을에서 백여 명의 장정들이 삽과 지게를 들고 나와 강물을 붙들어두는 일에 힘을 보탰다고 한다.

가을이 익어가는 요즘, 장월평천 둑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인의 노랫말처럼 물줄기를 따라 지즐거리는, 소소하지만 인정 많고 풍류 가득한, 송포땅 옛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들려올지도 모른다.

 

■ 참고자료 : 『고양의 지명이야기』(정동일, 고양시), 『사라져가는 전통마을에 대한 기록세미나』(이옥석 외, 고양문화원), ‘고양시 생태·하천 지도-장월평천’(고양시)

■ 도움말 : 신상훈 고양시 생태하천과장, 한기식 자전거21고양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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