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귀종의 경제칼럼>

[고양신문] 무거운 짐을 옮길 때 지렛대(lever)를 쓰면 도움이 된다. 체력이 약한 사람도 자기 체중보다 무거운 짐을 옮길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아주 긴 지렛대가 있다면 그걸로 지구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금융 지렛대(financial lever)를 이용한다. 자신이 가진 밑천에다 빌린 돈을 보태 집을 사거나 장사를 한다. 금융 지렛대의 척도인 지렛대 비율(leverage ratio)은 통상 ‘자산÷자본’으로 정의되는데 자본은 자기 돈을 의미하고, 자산은 자기 돈에다 빌린 돈을 합쳐 구입한 생산수단이나 투자자산을 가리킨다.

빌린 돈의 비중이 높으면 지렛대 비율이 높아진다. 허생(許生)은 아르키메데스의 장담을 금융 영역에서 구현한 연암의 소설 속 주인공이다. 그는 자기 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매우 높은 지렛대 비율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금융 지렛대의 집단적인 남용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나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모두 본질은 똑같다. 밑천과 상환 능력에 비해 남의 돈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쓰다 보니 위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몇 차례의 금융위기 후 국제 사회는 금융회사의 지렛대 비율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신문에 종종 등장하는 은행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위험가중자산)이나 보험사 RBC(Risk Based Capital) 비율은 금융회사가 자기 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렛대 비율의 변형된 산식일 따름이다.

금융회사는 자금 조달과 운용에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렛대 비율이 용인된다. 하지만 비율이 너무 높으면 금융감독원의 주목 대상이 된다. 기업도 지렛대 비율이 높으면 금융회사의 점검 대상이 된다. 2018년 국내 기업의 단순 지렛대 비율(자산÷자본)은 약 2배였다.

그런데 국내 가계는 지렛대 비율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집집마다 편차가 크고, 일부 가계는 그 비율이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다. 소위 갭 투자 때문이다. 한국은 LTV(주택가격 대비 부채 비율) 규제로 인해 집을 살 때 은행으로부터 집값의 60% 정도만 빌릴 수 있다. 즉, 5억원짜리 주택 구입 시 자기 돈이 2억원은 있어야 한다. 지렛대 비율로 환산하면 2.5배다. 하지만 주택 구입 직후 매매가 대비 60%로 전세를 주고 세입자로부터 받은 돈으로 다른 집을 구입하는 갭 투자를 하면 지렛대 비율은 4배로 상승한다. 다시 전세를 놓고 집을 구입하는 갭 투자를 반복하면 지렛대 비율은 6배까지 올라간다.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70%로 오르면 갭 투자를 통해 약 8배까지 높일 수 있다. 밑천 2억원으로 16억원 만큼의 다주택을 보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많은 집 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전환했다. 전세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전세 가격이 치솟았다. 은행들은 전세대출을 늘렸고 무주택자들은 빌린 돈으로 전셋집을 구해야 하는, 즉 은행에 월세를 내는 모양새가 됐다. 아파트의 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은 2008년 월 평균 40∼50%에서 2016년 70∼80%까지 상승했다. 그러자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갭 투자가 급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1인당 GDP는 미국의 절반, 영국과 일본의 80%지만 1인당 순금융자산은 미국의 7분의 1, 영국과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다. 높은 지렛대 비율로 집을 사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위험하다. 하지만 국내 가계의 갭 투자 규모와 지렛대 비율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지역에 갭 투자가 많은지, 집값이나 전세값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살펴보는 곳이 없다. 갭 투자의 속성상 파악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요즘 세계 경제가 불안하다. 경제가 관성의 법칙대로 계속 달려가면서 집값과 전셋값이 유지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은 갭 투자자가 누리지만, 갑작스런 하락에 따른 손실은 사회 전체가 부담해야 할 수도 있다. 취득세와 보유세가 강화돼 갭 투자자가 충분히 줄어들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경제가 잘 굴러가기를, 아니 갭 투자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커지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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