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김한수 소설가

[고양신문] 시월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대화동 농장에 나가보면 수확을 앞둔 땅콩은 잎이 말라가면서 줄기가 일제히 쓰러졌고, 들깻잎은 씹기가 힘들 정도로 억새지면서 들깨가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수명이 다해가는 열매채소들은 잎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지면서 제 역할을 다 했고, 십일월 초에 수확하는 울금 잎사귀마저도 서서히 누런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맘때부터 농부들의 일손은 가을 수확물을 거두느라 정신없이 바빠진다. 나 역시도 이래저래 거두어야 할 작물들이 적지 않다. 작물들은 저마다의 수확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아차 하는 순간에 멀쩡하게 잘 지어놓은 농사를 망치는 수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요즘 농장에 나가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원당역 근처에 천 평 규모의 밭을 새로 얻어서 한창 농장 조성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향후 몇 년간 대화동 농장에만 집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팔십 년대 후반에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선배를 삼십 년 만에 만나게 되었고, 내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원당에 자신의 땅이 있으니 두고두고 편하게 쓰라는 호의를 베풀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유랑민처럼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농사를 지어왔던 서러운 기억들과 이제는 정말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뒤섞이면서 가슴 한 켠이 울컥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지난 봄 사방팔방 농장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뛰어다니면서 겪은 서러움은 간단하지 않았다. 농장 얻는 걸 포기하기 직전에 기적처럼 대화동에 농장을 얻긴 했지만 사 년간 애면글면 농사를 지어온 땅에서 하루아침에 맥없이 쫓겨난 충격은 쉬 가시지 않았다. 그 여파로 갱년기 증후군이 찾아왔고, 나는 어금니를 사리물어가며 몇 달 간 혹독한 시간을 견뎠는데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나는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선배의 호의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농장설계에 들어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 농장설계를 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물론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 농장을 조성하자면 이래저래 돈도 많이 들고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문제는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막내 동생 부부는 일 억 가까운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해서 고깃집을 차렸는데 장사가 좀 된다 싶으니까 건물주가 동생 부부를 쫓아낸 뒤 그 자리에 유사한 고깃집을 차렸다. 최근에는 삼십 년 가까이 린나이에서 정규직으로 일했던 친구가 느닷없이 정리해고를 당한 뒤 귀농을 해보고 싶다며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갑자기 전세보증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통보에 더 싼 집을 찾아 발품을 파는 후배도 있고, 부당해고 철회하라며 목숨 걸고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웃도 있다.

어딘가에서 쫓겨난다는 건 참 지독하게 슬픈 일이다. 우리는 가진 게 없으면 쫓겨나는 게 당연한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이제는 모두가 다 함께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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