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귀종의 경제칼럼>

[고양신문] 낯선 두 사람 A와 B 앞에 돈을 놓고, A가 어떤 비율로 돈을 나눌지 정한다. B가 A의 제안을 수용하면 A가 정한 비율대로 돈을 나눠 갖지만, B가 거절하면 두 사람은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게 게임의 규칙이다. 경제학 논리에 의하면 A는 자신의 몫을 99% 정도로 정하고, B는 A가 정한 비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다. 최종 결정자 B는 1%라도 얻는 게 0보다는 이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의 실험에서 A는 50%에 가까운 비율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B도 자신의 몫이 50%에서 멀어질수록 A의 제안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B의 몫이 30% 미만이 되면, 대부분 B는 A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몫을 포기했다. 실험자가 A와 짜고 B의 몫을 60%, 80% 등으로 높이는 실험도 해 봤는데, B가 거절하는 경우 역시 꽤 많았다.

이 실험은 인간의 행동이 경제적 이득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공정하지 못한 상대방을 응징하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낯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호의를 보이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거나 부담스러워 하기도 한다.

진화 심리학과 행동 경제학을 연구 중인 폴 시브라이트(Paul Seabright) 교수는 ‘낯선 자들의 동행’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강한 상호주의가 인간의 진화와 문명 발달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선사 시대의 인류는 짐승들을 포함해 낯선 자들을 많이 죽였다. 살인은 자원 확보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병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류가 살해당할 확률이 최소 5%에서 40%에 이르렀기 때문에 낯선 자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어리숙함은 종종 죽음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을 합쳐도 살해당할 확률은 1.3%라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호모 사피엔스는 상대방이 나를 믿으면 나도 그를 믿고,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면 대(代)를 이어서라도 그에 복수하는 상호주의 전략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낯선 자를 환대하고 속임수와 배신에 공분했다. 상호주의가 집단 간의 규범으로 승격되면서 인간은 유전적으로 전혀 연관이 없는 낯선 자들과 분업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의식주의 대부분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얻고 있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채택된 진화의 산물, 즉 불공정한 자를 응징하고 싶은 인간의 감정과 상호주의에 대한 집착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발견된다. 그리스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자신의 여 시종을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한 영웅 아킬레우스가 대 트로이 연합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애초에 트로이 전쟁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자신을 환대해 준 스파르타를 배신하고, 그 나라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의 배신은 그리스 전 지역의 왕들이 연합해 복수전에 나서는 명분이 되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 불편해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조선과 일본은 전쟁이 아니라 국가 간 계약에 의해 합병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 계약이 공정했다고 믿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일본이 미안해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이런 불공정한 상호주의에 대한 맥락 없이 파편화된 역사의 기록 속에서 식민지 민중이 얻은 알량한 이득과 일제 악행의 '증거 부족'을 찾아내 진실 게임을 벌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상호주의적인 감정은 인간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계속 이어져 왔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해가 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지키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집중할 뿐 전체적인 결과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를 시야 단절(tunnel vision)이라고 부르는데,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이런 상호주의가 금융위기나 환경오염, 묻지마 범죄 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웃과 동식물까지 상호주의의 범주에 넣기 위한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 중요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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