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우리 가족 납치사건』

박미숙 책과 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고양신문] 경남 통영에서 작은도서관 운영매뉴얼 관련 강의를 해달란다. ‘우아! 통영이라니!’ 앞뒤 재지 않고 간다 했다. 그런데 수락하고 보니, 오가는 길이 문제다. 기차는 없고, 시외버스로 7시간 가까이 걸린다. 묘수를 짜내어 진주역까지 기차를 타고 통영까지 공유차를 빌려 다녀오기로 했다. 기차 안에서 노트북을 꺼내놓고 일을 하며 간다는 야심찬 계획과 함께.

가기 전날 새벽까지 밀린 일을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밀린 일을 하고, 기차 안에서 밀린 일을 했다. 다섯 시간 반 달려가서 두 시간 강의 하고 통영 바다는 냄새도 못 맡고, 진주 남강은 근처도 못 가고 다시 기차 타고 올라오는 길. 지금 이 글도 기차 안에서 쓰고 있다. 하…, 왜 이렇게 살지? 누가 나 좀 납치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 납치사건』(김고은 지음, 책읽는곰)에서는 딱 그런 일이 벌어진다. 아빠 전일만씨는 입만 열면 피곤하다고 한다. 엄마 나성실씨는 몸이 한 열 개쯤 되면 좋겠단다. 주인공인 나는 학교도 학원도 없는 곳에서 딱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살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납치를 당한다. 가방이 입을 쩍 벌리더니 아빠를 꿀꺽 삼켜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내려놓았고, 엄마는 현관문을 나서는데 훌러덩 치마가 보쌈 하듯 싸안고 아빠가 있는 바닷가에 내려놓았다. 나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데 머리 끈이 끊어지더니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숫자가 빠지면서 휭휭 날아다니다 엄마 아빠가 있는 바닷가에 툭 떨어졌다. 처음에 이런저런 걱정을 하던 가족들은 다 포기하고 바닷가에서 실컷 놀기 시작한다. 배고프면 과일 따먹고 고기 잡아 먹으며 하루 종일 논다. ‘그래도 별일 없었어요.’ 책은 이렇게 끝난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연간 평균 2024시간(4월 30일자 KBS 뉴스 보도 인용) 일한다. OECD국가 평균보다 35일 더 일하는 거다. 그런데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36개국 가운데 29위로 하위권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점점 늘어나서 2019년 8월 기준 750만 명. 12년 만에 최대치라 한다(10월 29일자 연합뉴스 보도 인용). 노동시간은 시간은 길고, 노동 생산성은 적고, 노동의 질은 낮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문제이다.

이쯤에서 요즘 자꾸 회자되는 기본소득제가 궁금해진다. ‘기본소득제란 모든 국민에게 빈곤선 이상으로 살 수 있는 월간 생계비를 지급하는 제도’이다. 재원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세금을 올려 해결해야 한다.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북유럽형 세금 제도가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그 논의에 함께 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다. 2월 23일자 한국일보에 따르면 ‘기본소득제’를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3%에 불과하고, 몇 번밖에 들어보지 못하거나 전혀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68%나 된다.

이렇게 노동시간, 노동 생산성, 노동의 질 문제와 기본소득제를 연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바쁜’ 이유를 단순히 개인에서만 찾을 수 없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기차 안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앞에 두 명과 옆에 앉은 한 명, 그러니까 앞뒤로 앉은 네 명이 나란히 노트북을 꺼내 일을 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휴대전화를 들고 자꾸 바깥으로 나간다. 잠깐 들리는 소리로 짐작하건데 거래처 전화다. 6시를 훌쩍 넘긴 시간인데 말이다.

‘그래도 별일 없었어요.’
내가 일하지 않는다고 별일 있겠냐 생각은 한다. 그래도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프리랜서는 이번 일을 거절하면 다음 기회가 오지 않을까봐 불안하고, 직장인들은 이러다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불안하다. 바쁘지만, 그렇게라도 자기 증명을 해내야 살 수 있다. 정말 별일 없다는 확신이 사회적으로 보장될 때 우리 삶의 질은 달라질 거다.

다 쓰고 나니 서울역 도착 멘트가 들린다. 다음에 통영에 갈 때는 반드시 노트북은 놓고 갈 거다. 1박 2일로 숙소도 잡을 거다. 그래도 별일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우리 가족 납치사건』(김고은 지음, 책읽는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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