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고양신문] 고등학교 3학년 때, 문학 선생님이 전교생에게 책 한 권을 권했다. 수능 지문으로 자주 출제되는 텍스트니, 가급적 전문(全文)을 읽어 두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당장 입시를 코앞에 둔 고3 수험생이 소설책 한 권을 통째로 읽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어느 페이지에 어떤 식의 ‘야한’ 장면이 나오는지 살짝 흘리는 것이 선생님의 유인책이었다. 1996년 일산의 어느 고등학교 앞, 주로 문제집만 팔던 서점에서는 『광장』을 쌓아놓고 파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도 그때 처음 『광장』을 만났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광복 이후 이념에 따라 남과 북은 갈라지고, 월북한 아버지와 달리 남한에 남은 철학과 학생 이명준은 아버지의 친구 집에 머물며 하릴없이 지낸다. 그러다 아버지의 대남 방송 때문에 심문을 받게 되자, 그전부터 ‘개인의 밀실’만 가득한 남한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라, 북한에서 ‘광장의 힘’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대중의 광장’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북한에는 복종을 위한, 허울뿐인 텅 빈 광장이 있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그러던 중 전쟁이 발발했고 포로로 잡히자, 남쪽도 북쪽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중립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명준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다.

1960년 잡지 「새벽」에 작품이 실리고 난 후 수차례의 개작을 거쳐, 60년 가까이 우리에게 읽히고 있는 『광장』. 나 역시 어설프게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한 뒤로 이번이 세 번째인데, 매번 새롭다. 개작을 통해서 ‘밀실’과 ‘광장’, ‘갈매기’의 의미가 변한 것 외에도, 분명 새롭게 읽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故 최인훈 작가의 아들 최윤구 님과 함께 명준의 선택(월북, 중립국, 자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첫 번째, 그는 왜 월북했을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아버지의 친구인 은행장이 그의 뒷배가 되어 줄 수는 없었을까? 그에게 ‘쉼’을 제공하는 윤애를 의지하며 남한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어차피 아버지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지도 않은데, 북한에서 이상향을 찾는 건 너무 안일하고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 그는 왜 중립국을 선택했을까? 남과 북에서 진정한 의미의 ‘광장’을 찾지 못한 명준으로서는 두 곳 모두 갈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했을 때 중립국에서는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중립국에는 ‘광장’이 있을까? 있더라도 그것이 명준을 위한 ‘광장’일까?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중립국’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본인 스스로 ‘밀실’에서 벗어나 ‘나’ 와 ‘우리’를 위한 ‘광장’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명준은 비겁하거나 나약하지 않은가?

세 번째, 그는 왜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수차례 그를 쳐다보는 어떤 시선과 환영. 그리고 그를 따라오는 듯한 갈매기 두 마리. 중립국에서조차 아무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듯하여 몸을 던졌든, 두 여자(윤애와 은혜, 또는 은혜와 배 속의 딸)의 손짓에 이끌려 그들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이든, 그의 죽음은 독자에게 마지막 장을 쉽게 덮지 못하게 한다. 그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마지막 선택에 대하여 의견과 감정이 분분하여, 모임을 함께한 최윤구 님에게 작가의 의도를 물었다. 살아생전 수차례 개작을 하면서까지 한 작품을 붙들고 있던 작가 역시 그 시대의 젊은 명준에게 너무 가혹한 짐을 지운 건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단다. 한번 손을 떠난 작품에 이토록 애정을 가진 걸 보면, 작가도 명준처럼 수십 년 ‘광장’을 생각했던 거 아닐까.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9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에서 ‘광장:미술과 사회’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당연히 이상향을 찾고자 했던 『광장』에서 핵심 개념을 차용한 전시다. 비록 명준은 전쟁의 이념 대립 속에서 좌절하고 작품 안에 잠들었지만, 2019년의 우리가 ‘밀실’에서 어떻게 뛰쳐나와 지금의 ‘광장’을 만들었는지 목격했다면 그렇게 슬퍼하지만은 않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광장』을 다시 읽는 이유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