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최초의 교회로서 개신교의 맏형 노릇을 해온 행주교회. 130년의 역사를 지나오며 초대 언더우드 목사 이래 현재 정건화 담임목사에 이르기까지 총 26분의 목회자가 행주교회를 섬겼고, 초대 신순익 장로를 시작으로 총 17분의 장로님들이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하며 오늘의 행주교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성경에서 보면 맏이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님께 바쳐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개신교의 맏이로서 행주교회는 5대, 6대를 이어가며 믿음의 가정을 배출했고, 여러 명의 사역자도 나왔다. 또한 고양시 초대 교회가 어떻게 활동했었는지 그 이야기도 간직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맏이 역할을 잘 하고 있다.

130주년을 맞은 행주교회 정건화 목사와 김신규, 김진옥, 김봉선, 한철근, 이종길, 이흥윤 장로와 함께 행주교회의 옛 이야기를 기록했다.

1890년 행주나루터는 지금 같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만큼 북적거렸던 곳이었다. 그랬기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곳에 교회를 짓게 된 것이다. 처음 예배당은 1894년 한귀련씨의 초가 6칸을 구입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에 행주교회 첫 예배당이 생겼다.

이후 1925년 모조기와집 15칸을 신축하여 이전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1937년 신사참배 반대를 하면서 행주교회는 핍박을 받아 집회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1942년 교회 종탑을 건립했다. 행주교회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더 큰 시련을 당했다. 전쟁 통에 기와집이었던 교회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김진옥 장로는 “가장 힘들었던 때가 6.25사변 때”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할아버지가 매도 많이 맞았고, 북한군이 이 땅을 점령했던 10여 일 동안 동네에 사상범들이 부친과 형님을 잡아갔고 그 후로 행방불명이 됐기 때문이다. 

젊어 혼자되신 모친이 광주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고 그 덕분에 현재 아들과 손자까지 6대를 이어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21년에 태어나 모진 세월 견딘 모친 이현순 권사는 지금도 1년에 성경 10독을 할 정도다. 전쟁으로 소실된 예배당은 이후 1955년과 1966년에 차례로 신축하며 교세를 넓혀갔다. 이후 1981년 또 한 번의 헌당예배를 드렸고 지난해에 비젼센터를 그리고 올해에 새 성전을 건축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종길 장로는 “50미터 떨어진 화장실과 비닐하우스 목양실 그리고 1980년 목사님이 사임하신 후에 안정감을 잃어버린 듯한 교회 분위기에 비젼센터와 새 성전 건축을 제안했고 장로님들의 적극 후원으로 건축하게 됐다”며 “옛날 논을 팔아서 헌금하시며 지은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짓겠다는 말에 흔쾌히 수긍해주신 장로님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를 바라보자’는 성경말씀대로 행주교회 130년의 역사에 매 순간마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보내며 새 일을 행하셨다. 유아세례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오는 은퇴한 원로 장로들에게 행주교회는 어린시절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해온 곳이다.

1950~70년대 여름성경학교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서울노회에 속한 연동교회나 숭동교회에서 교사강습회를 하면 거기에 가서 배워서 성경학교를 했다.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면 선생들과 집사들까지 다 불러다가 점심을 대접했다.

이웃한 성동마을에 전도를 나가기도 했다. 1969년 부임한 김상수 목사가 부임하고 교회에서 밴드 불고 북을 치자 무슨 교회에서 북을 치고 밴드를 부냐, 예배는 조용히 엄숙히 해야한다며 불평도 나왔다. 하지만 김상수 목사님이 많이 변화시켰고 성동마을 가서 노방전도 한다고 밴드불고 북치고 그랬다. 그 당시 성동마을 아이들이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많이 왔다.

옛날에는 부흥회도 많이 했다. 부흥 목사님 초빙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교회가 많지 않았을 때라 이 근방 뿐만 아니라 멀리 문산에서도 왔다. 먼 곳에서 온 성도들은 부흥기간 동안 보따리에 쌀 등을 싸갖고 와서 교인들 집에서 묵으면서 예배를 드렸다. 부흥회는 새벽에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아침에 성경공부하고 저녁에 설교했다.

이흥윤 장로는 1966년 당시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후 68년에 경기도 북부지역인 경북노회 성경고사가 있었는데 그가 가르친 4반 학생들이 대회 1등과 우수상 등을 휩쓸었다. “150~200명의 아이들이 보는 성경고사에서 1등을 했으니 꽤잘한 것이었다.”며 당시의 기쁨을 다시 한 번 표현했다.

행주산성에 올라가서 산 기도도 했다. 행주산성 성역화하기 전이었다. 1963년 경 박정희 대통령이 3번째 행주대첩비 완공식으로 행주산성에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올라갔다. 당시 총으로 쏴도 안맞을 만큼 대통령 경호를 엄하게 했고 산성 입구에서 빵을 나눠줬다.

크리스마스 때면 새벽송 도는 일이 그렇게 재미날 수 없었다. 차가 없었을 때는 대보둑을 걸어서 신평리까지 새벽송을 다녔고, 그 후 트럭에 호로를 치고 권사님들과 성가대원들 태우고 능곡 등으로 새벽송을 다녔다.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에 방문하면 감주를 따뜻하게 덥혀주기도 하고 떡을 내오기도 했고, 메고 간 자루에 과자 초코파이 등을 선물로 넣어줬다. 그러면 다음날 청년들은 둘러 앉아 그것을 나눠 먹으며 또 한 번의 파티를 열기도 했다.

“음악에 조예가 없어서 연습하려면 한참 해야했다. 한 소절씩 따라 부르기도 하고 그래도 안되면 교회 옆에 있는 집에서 밤에 연습도 하고 그랬다. 청년들은 그런 재미로 모이고 그랬다.”며 김신규 장로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던 젊은 시절을 기억했다. 김진옥 장로는 새로 들여온 풍금을 도난 맞을까봐 작은 기도방에 덜덜 떨면서 담요 뒤집어 쓰고 잤던 일, 혼자 배운 풍금을 치다가 풍금 페달을 너무 빨리빨리 밟았더니 풍금 망가진다고 야단맞았던 일도 이야기했다.

전기불도 없어서 담당집사님이 호롱불을 닦아서 걸어놓고 나무해서 떼거나 톱밥도 땠고, 주일학교 아이들 추울까봐 주변에 많았던 아카시아 나무를 쪼개서 난로를 떼기도 했다. 의자가 없어서 미군 담요를 마룻바닥에 줄맞춰서 잘 깔고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시골교회라서 재정이 어려웠고 그래서 교역자 모시기가 쉽지 않았다. 전도사님만 계신적도 있었고, 오신 목사님들도 오래 계시지 못했다. 교역자들께 생활비를 제대로 못드리자 신순익 장로가 논을 사서 경작해서 추수해뒀다가 춘궁기에 보관했던 벼를 털어 생활비를 드리기도 했다

정건화 목사는 “우리 교회는 시골교회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 선교를 해왔는데 이흥윤 장로를 통해서 태국 동야이에 교회를 지으며 선교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시 신장수술을 받아야 할 위험한 상황에서 수술비를 태국 교회 건축에 헌금했던 이흥윤 장로는 후에 신장수술까지 받았다. 이흥윤 장로는 “지난해에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수술을 시도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잘 되었다”며 “나는 선교와 건강을 모두 다 얻었다.”고 흐믓해했다.

앞으로 행주교회는 어떤 새 일을 계획하고 있을까. 정건화 목사는 “인천공항과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특성을 살려 해외와 북한 선교의 기지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고 “지친 성도들이 이곳에서 예배드리며 은혜 받고 쉼을 얻기를 바라며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리고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며 아름다운 교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교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5대, 6대째 믿음의 가문이 이어지며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 준비된 일꾼들이 있는 행주교회가 앞으로 고양시 개신교의 맏형 역할을 든든하게 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많은 기도와 성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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