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박미숙 책과 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고양신문] 12월이다. 2019년도 다 갔다. 시간이 지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나 그래도 12월이 되면 설레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정해 송년회를 하고, 크리스마스 때 쓸 카드를 산다. 작은 선물을 마련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생각에 들뜬다.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다 보니 갑자기 배가 출출하다. 엊그제 사다놓은 라면을 꺼낸다. 계란도 하나 꺼낸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고래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단추를 누르고 이웃나라 여자 아이는 물을 긷는다. 그 이웃나라 아이는 소를 몰고, 그 맞은 편 나라 여자 아이는 빵을 팔고,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아이는 쓰러져 있다. 바람이 분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고래이야기)

라면을 먹다 말고 문득 떠올린다.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아이. 그 아이 이름은 쿠르디(2015년 배가 침몰해 익사한 3살 난민 아이), 또는 무함마드 쇼하예트(2017년 군인들 총격을 피해 달아나던 보트가 뒤집혀 죽은 16개월 아이), 발레리아(2019년 강물에 휩쓸려 죽은 2살 난민 아이)일 지도 모르겠다.

라면을 먹다 말고 또 떠올린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 우물이 없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을 아이들, 월드컵 공인 축구공을 만들기 위해 학교도 못 가고 손이 부르터지게 일을 하는 아이들, 핸드폰 재료에 들어가는 코발트를 채취하기 위해 광산에서 일하는 아이들, 초콜릿을 제조하고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코코넛 열매를 따는 아이들.

유네스코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5세 미만 어린이 중 거의 2억 명이 발육 부진과 쇠약 상태에 놓여 있다 한다. 어린이 난민 문제도 심각해서 제대로 먹거나 교육받지 못하는 어린이 난민 수가 해마다 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보호자 없이 홀로 난민이 되는 어린이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강제노동 아동 수를 1억 68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전 세계 어린이 수를 7억 명으로 봤을 때 어마어마한 숫자들이다.

라면을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15년 전, 책으로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치기어린 생각으로 시작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그리고 도서관이 문을 연 첫 해 크리스마스이브부터 14년 동안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진행했던 이웃산타. 산타할아버지(또는 할머니)가 되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에게 책 한 권씩을 몰래 집에 배달했던 활동은 올해부터 진행하지 못 한다. 개인정보 관련법이 강화되면서, 아이들 주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안타깝다는 얘기를 한다. 나도 그렇다.

바람이 분다. 문득. 어쩌면 나에게 이웃산타는 면죄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는 일상이었을 가난과 질병, 고통과 공포를 눈감고 지나온 1년을 그 하루로 갚으려는 마음은 없었나 생각한다. 이웃산타를 진행하지 못한다 하니 그 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움보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놀 수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설레었던 나를 발견한다.

다시 15년 전으로 돌아간다. 만약 크리스마스 이브 때만 하는 이웃산타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할 일을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라면을 먹는 때만큼이라도.

내가 라면을 먹을 때, 바람이 분다. 이웃집 누군가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비데 버튼을 누르고, 물을 긷고, 소를 몰고, 빵을 팔고. 그리고 쓰러져 있을 이 시간. 그 아이들에게도 불었을 바람이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