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고양신문] 며칠 전 남편과 싸웠다. 난 무시당했고, 불공평하게 대접받았으며, 아내로서의 지위가 추락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부임에도 존중받아야 할 사적 영역을 그가 침해하고 간섭한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남편은 이 모든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나의 ‘예민함’과 ‘지나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그러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 나의 실수를 되짚은 점에 대해서‘만’ 사과했다. 우리의 협상은 결렬됐고 냉전 상태가 시작됐다.

사회언어학자 데버라 태넌에 따르면 “여성들은 ‘이 대화가 우리를 더 가깝게 해 주는가, 아니면 더 멀리 떼어 놓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하는 반면, 남성들은 ‘이 대화가 나를 한층 더 유리한 위치로 올려 주는가, 아니면 한층 더 불리한 자리로 떨어뜨리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적절한 사과를 받음으로써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우리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확인받고 싶었고, 그가 내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길 기대했다. 아주 약간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벌을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사안이 명백히 ‘서로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쌍방과실’이므로 본인의 일방적인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의 ‘과잉 반응’과 ‘인지부조화’, ‘확증편향’을 지적했다.

『사과에 대하여』(아론 라자르. 바다출판사)

미국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아론 라자르(Aaron Lazare)는 1000여 건의 사과 사례와 임상 경험을 통해 『사과에 대하여』라는 독특한 책을 썼다. 사과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사과를 왜 해야 하는지, 좋은 사과와 나쁜 사과의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가해자가 정확하게 사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증명이다. 그런데 사과의 첫 단추부터 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단 자신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하는 게 제일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인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을 덜고 싶어 하고 자존심을 지키려 하기에, 본심이야 어쨌든 간에 애매한 표현으로 사과를 표현하기 십상이다.

“제가 어떤 잘못을 했든지(혹은 제 모든 잘못에 대해) 사과합니다.”(애매한 사과 내용) “실수가 행해졌습니다.”(수동적 표현) “만일 실수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조건부 사과) “당신이 불쾌하셨다면 사과합니다.”(피해를 의심) “크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죄송하게 됐습니다.”(잘못의 축소) “피해를 주었다니 유감입니다.”(교만한 태도)

이런 사과를 듣고 내키지 않아도 용서를 하는 건,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거나 깰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가 성의 없는 사과에 익숙해져서 이 정도쯤에서 대충 수긍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존엄성, 자부심, 자존심이라는 건강한 감각을 열망하는 능력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사람 간의 갈등은 이 감각을 모두 유지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가해자는 죄책감 정도는 쉽게 인지한다. 그것은 잘못을 고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동시에 수치심도 느낀다. 사과 대상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는 않을까, 의기양양하게 굴진 않을까,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나, 오히려 화를 부추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쉽게 사과하지 못한다. 또는 사과를 함으로써 죄책감 이상으로 무기력감, 패배감,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틀간의 냉전 후 남편과 나는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차근차근 쌍방과실의 범위에 대해 좁혀 나갔고, 자신이 오해를 하게끔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2차 협상 테이블에서는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점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했다. 나는 존중받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당신이 사과를 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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