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 칼럼 <발랑까진>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고양신문] 2014년 4월을 나는 두 개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하나는 내 친구의 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 생이 입시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다. 또 하나는 304명의 목숨이 국가의 무능력 아래 수장됐던 세월호 참사다. 죽음은 세월호에만 있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세월호 선내 방송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계속되어온 경쟁과 차별에 순응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나는 또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특한 여학생을 넘어, 죽음을 만드는 체제를 바꾸는 정치인이 되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다양한 정치운동을 제안했다. 그렇게 청소년도 정치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18세 선거권이 국회를 통과된지도 어느덧 50일이 가까워간다.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의 감동을 기억한다. 우리가 얻은 승리는 투표용지 한 장을 넘어, 청소년도 시민이고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상식이었다. 이는 수십 년 간의 청소년 참정권 운동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러나 청소년의 참정권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월 31일에는 자유한국당 박인숙 의원 등 10인이 교육기본법 법률개정안을 발의했다. ‘학생은 학교 안에서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하여 다른 학생의 학습을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더 나아가 지난 2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시도교육청이 진행하려던 모의선거교육을 금지하겠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으며, 이어서 만 18세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여론조사 역시 불허됐다.

18세 선거권 뒤에는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가 따라붙는다.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투표할 것이며, 교실에서의 정치적 논쟁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참정권은 성숙, 미성숙 여부에 따라 선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나는 오히려 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때에, 어른들의 말에 휘둘릴 확률도 적어진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이 어른들의 말만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직접 판단하고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2020년 2월 12일,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진행한 '2020년 정치하는 청소년이 온다' 행사 모습. <출처=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진정한 학습권 침해는 학생들이 말할 권리를 빼앗긴 채로 교사의 지시에 굴종해야 하는 인권 침해적 현실에서 발생한다. 수십 년간 우리 사회에는 학내 성폭력과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고발과 증언이 이어져왔다. 최근에는 충렬여자중학교의 학생들이 교장으로부터 뺨 때리기 등의 신체적 폭력을 겪은 사실이 고발됐으나, 가해교사에 대한 처벌은 정직 2개월에 그쳤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문제제기할 수 없는 환경에서 거듭하여 폭력과 멸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야 말로, 심각한 학습권 침해가 아니겠는가.

학교는 이미 그 자체로 정치적인 공간이다. 학교의 기자재 하나를 결정하는 것도, 교과 시수와 내용을 결정하는 것도, 폭력과 차별 없는 학교를 만들어가는 것도 모두 정치의 문제다. 학교가 정치적이지 않은 공간이라는 믿음은 ‘학생은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학생은 시민이 아닌, 배움을 가져야 할 예비적 존재로 여겨진다.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우려를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있으라’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몰려야 하는 청소년의 삶을 떠올린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의 교실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18세 선거권 이후의 논란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축소하는 방향이 아닌, 더욱 적극적으로 교실의 정치화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늘도 ‘가만히 있으라’의 교실에서 끊임없이 정치할 청소년들의 투쟁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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