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권우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양신문] 온 나라가 신천지 때문에 난리다. 연일 코로나19 확진자 속보를 보면 대구와 경북지역에 집중해 있고 신천지 신자이거나 그쪽과 접촉한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이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당국을 보면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한동안 안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예배를 본 31번 확진자가 슈퍼 전파자로 밝혀지면서 국면이 완전히 전환되고 말았다. 사그라들기는커녕 불난 데 기름 부은 격이 되어버렸다. 급기야 신천지 지도자인 이만희씨가 국민에게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맨땅에서 절을 두 번이나 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 회견을 보면서 착잡했다. 말하는 품새나 어휘력, 그리고 진정성 등에서 기대 이하였다. 숱한 신도를 거느린 종교 지도자라고 기대할만한 품격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연히 그 많은 사람이 왜 저 사람을 신격화하고 섬기고 따를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언론에 나온 이런저런 분석기사를 찾아보면서 맥락을 짚어보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신천지 관련 글을 보면서 가장 자주 접한 낱말이 ‘이단’이다. 기성 기독교계는 신천지를 단죄하는 데 맨 앞자리에 나섰다. 신학논쟁 이전에 그럴만했다. 기성 교회에 신천지 신도를 보내 오랫동안 포섭작업을 해 아예 그 교회를 장악하는 수법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성 교단 처지에서 보자면 기가 찰 노릇이다. 텔레비전에 보면 교회 현관마다 신천지를 반대하는 스티커를 붙였던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싶었다. 교리로는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에서 갈리는 모양이었다. 기실 기독교는 종말론을 믿는 종교다. 마침내 이 땅의 삶이 마감되고 천년왕국을 거쳐 천국에 이른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그 종말이 몇 날 몇 시에 이루어진다고 확정한 집단도 있어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성경에는 종말의 정확한 때가 나오지 않는다. 비유와 상징으로 그 조짐을 밝혀 놓았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듯하다. 축어적으로,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그 비유와 상징을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해 풀이하는 교단이 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문제는 이른바 사이비 종말론자 때문에 기성교단이 성경에 기록된 종말론을 말하지 않는 데 있는 듯싶다. 잘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것은 저 하늘에 이르기 위해서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기성교단이 하늘에 복을 쌓는 삶을 말하여 왔을까? 지금 이곳에서 시쳇말로 대박 나는 인생을 가르쳐 온 것은 아닐까? 얼마 전 광화문 근처에 갔다가 기함을 하고 말았다.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 교회가 새 성전을 지었는데, 놀랍게도 옆에 있는 건설회사 사옥보다 더 높고 화려했다. 정말, 이 교회는 어디를 지향하는 것일까? 마구간에서 태어나 인류를 구원한 예수의 삶과 이 건물은 어울리는 것일까 곱씹어보았다.

낱말에는 힘이 있다. 이단이라고 하면 어딘가 음습하고 범죄집단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단아라고 하면 뭔가 혁신이나 창조성과 연관된 듯싶다. 어느 교단이 이단이냐 아니냐는 일반시민 처지에서는 판가름할 수 없다. 단지 신천지 관련기사를 보면, 기성 기독교는 문제가 없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기성 교단에 실망하거나 절망했기에 신천지로 가지 않았을까 해서다. 더욱이 청년들이 신천지에 몰린 이유를 다룬 기사를 보면 사회의 책임도 만만찮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신천지의 행태를 보건대,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며 사회적 비난이나 법적 책임을 면죄 받을 수는 없을 듯싶다. 집요하고 체계적인 선교방식을 두고 시비 걸 수는 없더라도 자유롭게 탈퇴할 수 없다면 이는 문제이다. 하지만, 기성교단이 자신 있게 이단이라 정죄할 자격이 있는지는 깊이 성찰해보았으면 싶다.

신학이나 교리의 잣대로는 단죄할 수 있겠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무엇보다 돈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나나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다면, 그 자체가 이단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되묻고 싶은 게다. 정말 기성교단은 어렵고 억울하고 상처 입은 이웃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

당연히 이 질문은 나 자신은 그런 삶을 살았는지 이번 기회에 되돌아보라는 자성의 채찍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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