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하루여행> 헤이리예술마을 ‘노을숲길’

전 구간 무장애 나무데크 이어진 산책로
키 큰 침엽수, 멋진 활엽수 교대로 반기고
정상 전망대에 서면 남녘땅·북녘땅 한눈에

[고양신문]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의 화두라지만 햇살 따스한 봄날씨가 나들이꾼으로 하여금 신발끈을 묶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가능하면 소박하게, 가깝고 한적한 곳을 잠깐 다녀오는 게 코로나 국면의 나들이 예절일지도 모르겠다. 평일 오후 짬을 내 파주 헤이리예술마을로 향한다. 헤이리는 주말이나 휴일에 들러야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많다지만, 오늘의 목적은 헤이리마을 뒷동산에 새로 조성된, 무장애 산책데크로 이어진 ‘노을숲길’이다.

 

정상 전망대를 올려다 본 모습.

느긋하고 여유로운 평일 헤이리마을

헤이리마을에 들어서는 게이트는 모두 아홉 개나 된다. 하지만 어느 게이트로 들어서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두 발로 걷기를 권한다. 멋진 건축물과 작은 개울, 세련된 카페와 벤치가 이어진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산책코스이기 때문이다. 기자 역시 일부러 노을숲길 입구 대각선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댔다. 헤이리마을을 조금이라도 더 둘러보며 목적지에 닿고 싶은 마음에서다. 평일 오후의 헤이리는 예상대로 한가하고 여유롭다. 개성을 뽐내는 매장들과 시차를 달리하며 들어선 건축물들을 천천히 살피며 걷다 보니, 수령이 지긋한 느티나무 앞에 다다른다. 마을을 굽어보며 50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킨 느티나무야말로 헤이리가 품은 귀한 예술작품이다.

노을숲길의 시작점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시공간인 한향림 도자박물관 진입로 근처다. 근처 산수유나무 줄기마다 노란 꽃망울이 이제 막 발화하고 있다. 고양시청 앞마당의 산수유는 한참 전에 만개했는데, 파주가 고양보다 계절이 조금 늦는가보다. 산수유는 계절의 경계에 피는 꽃이다. 봄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겨울이라고 하기엔 늦은 시절의 어정쩡함을 화사한 노란색으로 채워주는, 참 고마운 꽃이다.

헤이리 마을을 지키는 500년 된 느티나무.

아이도 어르신도 반려견도 ‘환영’

완만한 경사로 이어진 산책데크.

산책로 초입에 안내간판이 서 있다. ‘헤이리 무장애 노을숲길’. 총 거리는 1km, 소요시간은 왕복 40분이라고 적혔다. 물론, 풍경과 햇살을 즐기느라 늑장을 부리는 건 나들이꾼 마음이다.

산책로는 전 구간이 걷기 좋은 나무데크로 이어졌다. 경사로를 직선으로 올라가면 5분이면 올라갈 거리를 너댓 번 방향을 꺾으며 갈짓자를 그려나간다. 아이들도 어르신도, 휠체어를 밀거나 소형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도 힘 들이지 않고 산책을 즐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코스는 정상의 전망대를 향해 달팽이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덕분에 시야의 고도는 아주 천천히 달라지고, 조망의 방향은 수시로 변화하는 특별한 산책경험을 할 수 있다.

숲은 키 큰 침엽수와 수형이 멋진 활엽수가 적당히 섞여 있어 심심함을 덜어준다. 군데군데 숲을 정비하며 잘라낸 통나무조각으로 재미있는 조형물도 만들어놓아 발걸음을 멈추고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누르게 한다.

 

동서남북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전망

출발하고 30분 남짓, 어느새 넓은 전망대로 꾸며진 정상에 올랐다. 높이 100미터도 안 되는 나지막한 언덕이지만 정상은 정상이다. 돛단배를 연상시키는 그늘막과 벤치, 그리고 통나무의 모양을 살린 의자도 있다. 중앙에는 여러 개의 녹슨 철판에 구멍글씨를 새긴 임옥상 작가의 조형작품이 설치돼 있다. 새겨진 글은 신대철 시인의 시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로서, 이념의 상처로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기리는 내용이다.

높이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정상은 오르막의 수고를 잊게 만드는 멋진 전망을 품고 있다. 노을숲길의 끝에서 만나는 정상이 이를 잘 증명한다. 북동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망을 살펴보자. 멀리 월롱산 너머로 파주디스플레이 공단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동쪽 멀리 사패산 아래쪽은 양주땅이고, 오른쪽으로 북한산 암봉의 늠름한 실루엣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다. 북한산과 전망대 사이에는 금촌 시가지가 오밀조밀하다. 더 멀리 남산 서울타워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날씨가 쾌청했으면 가시거리가 보다 선명했으리라.

쾌적한 쉼터가 마련된 정상 전망대 모습.

동남쪽으로는 가까이에 운정신도시, 멀리는 일산시가지가 중첩됐다. 고봉산 첨탑과 제니스빌딩은 어디서나 일산 북서쪽 스카이라인의 랜드마크를 담당하고 있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발 아래 헤이리예술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검단산과 오두산의 야트막한 능선이 정겹게 둘러있고, 더 먼 곳을 응시하면 인천 계양산의 첨탑도 찾아낼 수 있다.

동쪽의 전망은 강줄기를 따라가며 살펴야 한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뒤편으로 살짝 비치는 물빛은 한강이고, 성동리 너머로 연천 장단면을 감싸고 흐르는 강줄기는 임진강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나무가 드문 민둥산이 펼쳐진 땅은 북녘 땅 개풍군이다. 파주땅과 개풍땅의 사이에는 삼엄한 철조망이 첩첩이다. 동북쪽으로는 개성의 명산 송악산의 암봉들이 마치 북한산과 대칭을 이루듯 자리하고 있다.

신대철 시인의 시를 음각한 철제 조형물.

경계를 넘어 평화가 꽃 피려나

남에서 흘러내려온 한강과 북에서 흘러내려온 임진강은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만나 큰 물줄기를 만들어 서해로 향한다. 멀리 김포 문수산과 더 멀리 강화 마니산을 가늠하면 하나가 된 물줄기의 진행방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의 바닷물과 몸을 섞는 수역을 옛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강, 조강(祖江)이라고 불렀다. 한반도 중부 문화의 근원이 이 물줄기를 통해 형성됐다고 믿어온 까닭이리라.

시야에 들어온 도시들을 꼽아보면 파주와 고양, 연천과 양주, 서울과 인천, 김포와 강화, 그리고 북녘 개풍군과 개성시까지 열 손가락을 꼬박 채운다. 나지막한 언덕 정상의 전망치고는 품은 지평이 참 넉넉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금 그은 경계라는 게 대체 뭘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억지로 구분을 하려 드니 눈에 들어올 뿐이지, 사실 연봉으로 이어진 산줄기와 결국에는 하나로 만나는 물줄기에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계절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절, 인간이 잘라놓은 경계선이 봄눈처럼 녹아내리고, 평화를 소망하며 심은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산수유나무처럼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을 꿈꾸어본다.

헤이리 무장애 노을숲길 입구.

 

벌목한 통나무를 활용한 조형물.

 

강아지와 함께 산책로를 걷는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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