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뭉게가 사라졌다. 매번 자신의 목을 옥죄던 줄을 이빨로 뜯어내어 너덜너덜하게 만들더니, 하루는 목줄을 풀고 밤새 돌아다니다 돌아오더니, 목줄을 풀지 못해 담벼락에 매달린 채 컥컥 대더니, 사라져 버렸다. 텅 빈 개집을 발견한 날, 지하공장 여주인이 산책을 시키려 나갔나 생각했다. 조금 지나면 돌아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날 저녁 뭉게는 돌아오지 않았다. 뭉게가 사라지자 골목이 고요하다. 밤늦게 쉰 목소리로 짖어대던 뭉게가 사라지자, 난 오히려 이 어두운 침묵이 두려워졌다. 혹시나 줄을 끊고 밖을 돌아다니다가 자동차에 치이지는 않았나 걱정이 몰려왔다. 뭉게의 소리가 사라지자 내 속에서 온갖 아우성이 휘몰아쳤다.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뭉게가 사라진 것이 마치 내 잘못인 양 자책감이 들었다.

코로나 사태로 온종일 도서관에 있는 날이 많았다. 강의도 없어지고 만남도 줄어들어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책을 읽으며 보냈다. 글을 쓰며 견뎠다. 밖에 나가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그러나 뭉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기억날 때마다 책도 읽히지 않았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괜히 도서관 마당으로 나가 텅 빈 개집을 서성였다. 도서관 월세를 두 달 동안 내지 못하자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계약기간이 끝나가는데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수입이 없으니 월세를 코로나 기간 동안이라도 조금 깎아주면 안 되겠냐는 송구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였다. 10년 넘게 지내던 도서관에서 나가야하나 걱정이 앞섰다.

집주인 내외가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도서관에 방문했을 때, 나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었다. 주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주인 내외를 만났다. 나의 사정 여부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싸게 사용하지 않았냐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사실 도서관 임대료는 주변에 비해 싼 가격이었다. 더 이상 임대료를 내지 못하면 공간을 빼시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에 다른 말을 섞지 못했다. 나도 사라질 운명이로구나 생각했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흘렀는데, 건물주가 입을 열었다. “뭉게도 지하 공장 주인이 데려갔어요.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말해서 허락을 했지요. 그동안 개 때문에 건물 앞이 지저분했는데 다행이지요. 말이 나온 김에 건물 앞에 지저분하게 펼쳐진 텃밭상자도 치워주시고 깨끗하게 사용하셨으면 해요. 흉가처럼 보이잖아요…….” 주인의 말이 이어졌으나 나는 뒷이야기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대신 뭉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친절한 지하공장 주인네가 입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아, 뭉게가 살아있었구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입양된 것이로구나. 정말 다행이다. 정말 고맙다. 다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뭉게를 돌보겠다는 고마운 새주인이 생겼구나. 뭉게의 노년생활(?)이 외롭지는 않겠구나.
 

▲ 김경윤 작가의 작업공간인 자유청소년도서관 앞에는 늙은 개 ‘뭉게’가 살고 있었다. 작년 6월 김경윤 작가 인터뷰 당시 뭉게와 찍은 사진.

뭉게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자,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텃밭 상자가 없어지면 어떠랴,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면 어떠랴, 뭉게가 살아있다. 뭉게가 살아있다. 계약서를 다시 쓰기로 했다. 그동안 월세를 못 내 까인 보증금으로 다시 보증금을 설정했다. 월세가 많이 밀리면 계약이 종료된다는 조건 항목에 어떠한 이견도 달지 않았다. 뭉게가 살아있으니, 괜찮았다. 설령 도서관이 사라진다고 해도 괜찮다는, 말도 안 되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했다. 삶은 지속될 테니까.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함께 할 사람들만 있다면 괜찮을 테니까. 뭉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뭉게야, 새로운 주인집에서 잘 살아라. 나도 잘 살아볼 테니까. 죽을 때까지 잘 살아보자.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