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귀종의 경제칼럼>

[고양신문] 알바 대신 공부에 몰두한다,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다니던 회사가 망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물가가 싸고 조용한 지방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아이는 서너 명 낳아서 기른다, 남편이 폭력을 쓰면 즉시 이혼을 통보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제도를 실시하는 나라에서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상상도다. 보편적 기본소득제도란 모든 국민에게 기초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소비 안정에 기여한다. 소비가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경제도 안정화되고, 결국 세금 낼 사람도 많아진다. 저출산과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기본소득제도가 일할 의욕을 꺾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거의 200만원인데, 이는 통상의 기본소득보다 훨씬 많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논의되고 있는 긴급 재난지원제도는 현실과 타협한 기본소득제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생계에 대한 걱정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 품위를 잃지 않도록 지원한다는 점은 보편적 기본소득제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한국의 15세 이상 노동가능인구 4500만 명에게 1인당 기본소득을 매달 최저생계비 수준인 100만원씩 지급하려면 연간 54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50만원씩 지급하려면 270조원이 필요하다. 2018년 기준 개인과 기업이 낸 세금이 380조원이고 복지 부문 지출은 150조원이다. 기존 복지를 모두 없애더라도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감당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취지가 좋다고 밀어붙이면 국가부채만 늘어난다. 

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본소득제도는 일부 소득계층에만 적용되거나 단발성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하위 소득자에게만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식은 재원부족 문제를 완화시켜 주지만, 누가 하위 소득자인가를 둘러싸고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한다. 갈등 완화 방안으로서 일정 기준 이하 소득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마이너스 소득세가 일부 대안이 될 수는 있다. 예컨대, 월 소득 700만원을 기준점으로 하고 20%의 마이너스 세율을 적용한다면 기준점 근방의 월 650만원 소득자에게는 50(=700-650)만원의 20%인 10만원만 제공되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재원 확보를 위한 거의 유일한 방안은 세금 인상이다. 세금 인상은 생산 활동을 저해하거나 일자리를 줄인다는 딜레마가 있다. 이런 딜레마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세원은 재산세다. 국내 상위 30%의 가구 소득은 하위 70%의 소득을 합친 것과 비슷하지만, 순자산 기준으로 보면 국내 상위 30%의 순자산은 하위 70%가 가진 것보다 3배나 많다. 순자산의 대부분은 생산 활동과 상대적으로 가장 거리가 먼 부동산이다.

국내 가계가 보유한 아파트 시가총액은 약 3400조원이다. 기업들도 고유 영업보다는 부동산 보유에 관심이 많다. 국내 경제주체들이 보유한 건물과 토지의 시가총액은 1경 3000조원인데, 이를 GDP로 나눈 비율은 해외 선진국의 거의 두 배나 된다. 미국, 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 수준으로 평균 1% 재산세를 부과해도 이론상 130조원의 세금 부과가 가능한 규모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가 많은 돈을 퍼부었지만 경기회복 효과보다는 부동산 투기라는 부작용이 더 컸다. 이번에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 돈을 풀더라도 부동산 과세를 더 강화해 기본소득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재산세 인상에도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다면, 그만큼 늘어난 세금은 월세를 내며 생계를 꾸려가는 저소득자와 자영업자 지원에 활용하면 된다. 재산세 인상으로 투기가 억제되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한다면 세금이 줄어 복지재원은 줄겠지만 그 대신 주거비와 임대료 안정, 소비개선 효과가 생겨난다. 이는 보편적 기본소득제가 지향하는 목적과 다르지 않다.

재산세는 지방세라는 한계가 있다. 서울시가 돈이 많은 이유는 재산세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은 국토가 작은 나라다. 국민적 합의를 통해 재산세를 국민 경제적 차원에서 융통성 있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제도적 제약이 아니라 관심과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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