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만 문봉서원장(전 고양문화원장)

[고양신문] 고양시 청사 이전으로 시민과 행정에 양분된 의견으로 고양시가 매우 시끄럽다. 옛날 관아부터 시작하는 고양시청 변천사를 적어보았다. 특히 필자가 고양문화원 원장과 고양시사 편찬 상임위원으로 재임하며 접한 고양군청의 이전 과정을 고전과 기억을 되살려 알려드리고자 한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온 역사의 기록

백제가 고양 땅 일대를 경영하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양 땅을 차지한다. 고구려는 고봉에 달을성현, 행주에 개벽현을 설치하였다. 고구려는 77년간 한강유역을 통치하다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이 지역을 다시 신라에게 내 주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고양 서울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청했고, 고려시대에는 행주, 고봉현으로 통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3년(1394년) 감무가 설치됐고, 이어 태종 때인 1413년, 고봉현과 덕양현을 합해 비로소 고양현이 되었다. 최초의 고양현 치소(군청)는 원당리에 두었다. 그 후 성종2년(1471년)에 관내에 경릉과 영릉(서오릉)이 있기에 고양현은 군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천묘장소가 고양관아 자리로 결정되자 고양관아는 장령산 동쪽(지금의 관산동 고골)으로 옮겨졌다가(1537년) 다시 고양동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양의 범위를 축소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고양군청이 서울 서대문으로, 다시 을지로 5가로 이전하였다. 이처럼 고양군청이 서울에 자리하는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61년 8월 7일, 5.16 군사정부는 각령 87호를 발표해 서울에 있는 지방 관청들을 각 지역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중앙청 앞에 있던 경기도청은 인천으로 갔다가 후일 다시 수원으로 이전했고, 을지로5가에 있던 고양군청은 고양군 원당읍 성사리 원당면 사무소로 이전하였다.(1961년)

1963년, 박용관 옹이 희사한 대지 위에 건립된 현재의 고양시청.

 

 


박용관 옹 부지 희사로 원당에 지어진 고양군청

서울 을지로 군청을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것은 고양군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당시 원당으로 이전이 확정된 결정적 이유는 청사 부지의 희사였다. 경쟁지였던 일산은 경찰서와 전매서가 있는 유리한 지역이었으나, 당시 혁명정부하에서는 부지 매입비가 없었다. 군청사 부지 4000여 평은 엄청난 재정이 필요한 크기였다. 또한 원당은 위치상으로 보나 교통망으로 보나 고양군의 중심지역이었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육군준장 박창원은 “지역의 민원이 합치된다”면서 군청 부지를 원당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원당면의 군청부지 희사에 따른 이면사는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일산이냐 원당이냐의 치열한 유치경쟁이었다. 전 원당면장 정태만(1950~1959), 이재호(1959~1961)와 권용훈 면장 등 지역 원로 유지들이 중론을 거쳐 현 시청부지 소유주였던 박용관(1900~1971)옹의 땅이었던 감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과수원이 위치가 매우 적합하다고 결론를 내린다. 이러한 의견을 박용관 옹에게 건의하니 박 옹께서 즉석에서 쾌히 응낙하였다고 한다.

박용관 옹은 이전에도 원당초등학교 부지 3000여 평(현 농협 고양시지부)을 희사하였으며, 이후 고양보건소 대지 600여 평도 희사하였다. 후일 필자를 비롯한 고양유지들이 송달용 군수에게 건의하여 작고한 박용관 옹의 공적비를 시청 마당에 건립하고 추모하고 있다.


영원히 기억돼야 할 숭고한 기부문화

박용관 옹의 행적을 기리는 공덕비. 고양시청 마당에 세워져 있다.

잠깐 박용관 옹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15세에 조실부모하고 땅 한 평도 없는 고아로 자랐지만, 어린 동생과 억척스럽게 품팔이를 하며 모은 돈으로 땅을 사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중국에 싣고 가서 판 돈으로 명태 등을 사오는 장사로 큰 돈을 벌었다. 점차 부유해진 박용관 옹은 지금의 시청 앞에서 정미소를 차릴 정도로 재정이 튼튼해져 주위의 토지도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피란을 못 간 박용관 옹은 새로 지은 집을 인민군에게 접수당하고 반동분자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인민군들은 지주인 그를 죽이려고 끌고 갔지만, 소작농을 하던 이들이 “이 사람은 아무 죄도 없고, 소작농들에게 잘해주었다”고 증언을 해 줘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의 인품이나 심성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다.

그의 동생 박용택씨도 1960년대에 고양군청이 있는 동네에 장터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5일장인 배다리시장을 무상으로 개설했다고 한다.
희생과 봉사정신은 대를 이어갔다. 그의 손주 박상조(1947~)씨는 성균관대를 나온 후 사업에 성공하여 모교인 성균관대에 ‘추강 장학회’를 설립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등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기부문화를 실천하고 있다.

고양시청 청사 이전의 분분한 의견이 있는 시점에서 그간의 일들을 간략하게 기술하며 이야기를 남긴다. 잘못된 표현은 이해와 충고를 바란다.

- 고양인 이은만
 

<고양시청 이전 약사>
* 원당리 치소(현 서삼릉 희릉) : 1413~1536년 (123년)
* 대자동 고읍마을 : 1536~1625년 (88년)
* 덕양구 고양동 : 1625~1914년 (289년)
* 서울 서대문 충정로 : 1914~1936년 (22년)
* 서울 동대문 을지로 5가 : 1936~1961년 (25년)
* 고양군 원당면 : 1961~1963년 (2년)
* 현 주교동 600번지 : 1963~현재

 

고양시청에 신청사 부지 확정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고양시청 신청사는 원당 주교제1주차장 부지에 건립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