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코로나19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영웅들’을 위해서 ‘엄치척’한 손을 다른 손으로 떠받드는 사진을 찍어 공유하자는 캠페인이 일어났다. 나는 그 캠페인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한 선배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캠페인을 전개하며 3명을 지명하면서 내 이름을 올리셨다. 평소에 존경하는 선배였기에 망설였지만, 결국은 희망캠페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이러한 요청은 계속 되었다. 경기도공동모금회의 통장으로 3650원을 기부하고 친구 3명 이상을 지명하자는 평생교육 명의의 요청에도 3650원을 기부했지만, 3명 지명에 가담하지 않았다. 돌봄사각지대의 시민들을 지원하는 107만 고양시민 it’s OK 107 캠페인에도 1만원을 기부했지만 널리 알리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서로 응원하고 협력하고 극복하고 기부하는 좋은 일에 나는 왜 소극적으로 행동했을까? 어둡고 힘든 시기에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동조하여 응원하고 기부하는 방식으로 ‘계몽적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내가 범했던 ‘기성세대’로서의 ‘자책감’을 ‘자기면책’하는 것이 혹시 뻔뻔한 짓은 아닐까 하는 어두운 마음 때문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차별 없이 전파되지만, 그 영향력은 엄청난 차별을 양산한다.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참변을 겪는 것은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이고,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빈곤국일수록 그 피해는 극심하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도 감염이 되었다는 진단조차 불가능한 나라가 전 세계에는 수두룩하다. 팬데믹 사태로 어떤 사람들은 세계여행을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조차 버릴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자 공기가 맑아졌다며 미소 짓는 얼굴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숨 쉴 수조차 없어’서 목숨을 잃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다. K방역으로 코로나의 위험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삶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K방역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재난기본소득 역시 호주에게 지급됨에 따라 호주가 아닌 사람들은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호적을 잃은 거리의 노숙자들, 불법으로 체류하며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 시간을 다투며 택배를 다녀야 하는 기사들, 여전히 위험한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갉아가며 노동하는 하청노동자들에게는 코로나와 더불어 삶 자체가 위험전선이다.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외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외세가 아니라 장성 안쪽 부패한 권력자들이었다. 의료전선에서 목숨을 걸며 일했던 의료인들에게 수당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지방권력, 수조원의 상속세를 내지 않으려고 온갖 경제비리와 정치적 비리를 저질렀던 대기업의 책임자들과 그 하수인들, 이러한 비리를 방관했던 사법권력과 그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언론권력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코로나 이후에도 코로나보다 무서운 부패세력이다.

권력의 부패로 최대의 피해를 입는 것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일반 서민이고, 서민의 자격조차 갖지 못한 법외인이며,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약자들이다. 목숨 외에는 어떠한 권리도 없는 약하디 약한 자들이 국가의 약한 고리이다. 지금 우리의 임무는 우리나라가 위대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갔다며 좋아하고, 위기가 기회라고 되지도 않는 용기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이 약한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약한 고리는 오늘도 쉼 없이 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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