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유정길]

유정길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감동적인 시애틀 추장의 연설

[고양신문] 아메리카 인디언이 살던 땅에 백인들이 들어와 강탈하던 서부개척시대, 미국 대통령은 인디언 추장 시애틀(Seatle)에게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을 팔라고 압박을 해왔다. 물론 형식적인 절차일 뿐 강탈과 다름없는 협박이었다. 이때 그 추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워싱턴의 대추장(미국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중략)…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땅을 빼앗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나요?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입니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 연설은 감동의 명문으로 알려져 세계 환경운동가들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과거 ‘노비’와 ‘노예’는 봉건영주나 양반들의 소유였다. 그러나 지금 노예란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태양은 태양이고, 강물은 강물이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다. 누가 소유한다는 것은 그저 사회가 만들어놓은 ‘관념적 합의’다. ‘근본의 자리’가 있을 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다. 돈을 지불한다고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돈을 지불하는 것이 ‘내 것’의 징표가 된다면 노예를 구입해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그러나 여전히 아내나 남편, 자식들도 ‘내 소유물’로 생각한다. 과연 부인은 내 것인가? 아이들은 ‘내 것’인가? ‘내 것’이라는 생각, ‘소유’라는 생각은 허상이며 망념이다. 모든 욕망의 시작이다.


돈 주고 산 노예는 당신의 것인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내 부속물처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그것이 온갖 교육문제와 청소년문제를 만든다. 내 아내, 내 남편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려고 싸움이 일어난다. 그래서 가정불화와 차별이 늘어난다.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으려고 하고 내 땅을 넓히려고 분쟁이 발생하고 대립과 전쟁이 일어난다.

내 것이니까 각별히 아낀다지만 오히려 내 것이라서 함부로 한다. 내 땅이 내 것이라 함부로 파헤친다. 자연은 인간을 포함하여 온갖 벌레와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나무는 새들의 것이 아니다. 숲은 노루나 곰의 것이 아니다. 풀들은 벌레들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만이 자연을 구획하여 돈 주고 샀다고 내 것이라고 울타리를 만들고 내 영역, 내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돈벌이와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파헤치고 개발하고 파괴하며 결국 심각한 환경문제와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불교는 무소유의 종교이며, 무소유를 주장하신 법정스님처럼 청빈한 삶을 미덕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무소유는 청빈한 삶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내 것이란 본래 없다’는 자연의 속성을 말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사실이 아닌 인포데믹(유행되는 거짓정보)이듯, 소유라는 것은 인류가 갖고 있는 집단적 인포데믹의 표상이다. 자본주의 뿐 아니라 그를 비판한 맑스도 자원은 무한하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무한한 개발과 풍요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백히 자원무한주의는 잘못된 지식임이 하나뿐인 지구(The Only One Earth)라는 말로 증명되었다.

가격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금이나 다이아몬드는 비싼 가격의 물건이다. 그에 비하면 쌀이나 음식은 아주 싼 물건이다. 그러나 먹을 게 없는 비상의 상황이라면 금이나 다이아몬드는 소용없다. 오히려 쌀과 식량이 비싼 값이 될 것이다. 희토류나 우라늄 등은 지금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지만 그 가치가 확인되기 전에는 그저 일개 광물이나 흙일 뿐이었다. 가격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도 집단의 관념이 만들어낸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다. 가격이 곧 가치는 아닌 것이다. 비싼 물건이 곳 높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사소한 티끌과 쌀 한 톨도 온 우주가 엮어 만든 합작품으로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다. 가격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무소유의 사회란 가격이란 없으며 본래 내 것이란 없기 때문에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가게 풀어놓음으로써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커먼즈(Commons)와 공유사회

최근에 ‘커먼즈’라는 말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본래 모두에게 속한 것인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개인이 사유화한 것을 다시 공동의 것으로 돌려 함께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 누구의 소유일수 없는 자원과 자연환경을 본래대로 공공으로 돌리고, 갖고 있는 물건이나 공간 등을 모두 같이 공유하자는 것이다.

몇 년 전 서울은 공유도시를 선언했다. 사무실을 공유하고 장난감, 옷, 동화책, 갖고 있는 물건을 공유한다. 필요한 물건을 공동으로 같이 쓰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그것을 위해 개별적으로 구매하기 위해 지불해야할 돈이 절약된다. 모두가 함께 사용함으로써 쓰지 않고 버려질 물건이 오래도록 쓰이게 되어 쓰레기가 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도로, 상수도, 공원용지와 도서관, 의료, 철도 등을 개인에게 팔아 사유화시키려고 한다. 대기와 물, 해양자원, 산림, 광물, 문화유산과 각종 지식까지도 사실은 개방형자산이며 공유재이다. 이것을 사유화하려는 순간,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다. 공공재에 대한 접근권과 사용권은 평등해야 한다. 모두가 수혜를 받도록 하고 모두가 돌봐야할 공동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공유가 확대되면 소유의 의미는 사라진다. 무소유의 사회가 된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뜻에 “우리가 쓰는 자연은 미래세대의 것을 빌어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 뜻은 미래세대의 ‘것’이라는 소유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은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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