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마을 원주민으로 입주해, 양봉 키우며 건강도 되찾고, 숲 해설가 위해 공부 중

꿀벌을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하며 숲 해설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중인 꿀벌인 이만석 중산동(2통) 통장연합회장. 평범하고 순박한 모습의 그는 요즘 말로 꿀 떨어지는 미소와 성품,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20여 년 동안 한봉을 하는 부친 곁에서 토종벌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서 인지 그의 직업은 현재 양봉업이다.

이만석 통장은 중산마을과 양봉, 그리고 숲을 사랑하는 사랑꾼이다.

백운산이 가까운 강원도 원주군 판부면 서곡리가 고향인 이만석 통장. 2남 3녀의 넷째이자 장남인 그는 학창시절을 원주에서 보내고 20대 중반인 1988년 서울 성북구 수유리 친구집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다. 그렇게 시작된 첫 서울생활의 직업은 일당제 용역 회사였다. 낯설고 힘들었지만 하루일당을 만지는 재미는 쏠쏠 했다. 하지만 일당제로 돈을 모으기 힘들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법인택시로 직장을 옮겼다. 3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돈을 벌었다. 
“이때만 해도 서울에는 일이 넘쳤습니다. 무엇을 해도 잘 되는 서울올림픽의 해였습니다. 그래서 직장 옮기기도 쉬웠구요. 일하는 만큼 벌어가는 구조였기에 즐거웠습니다. 그러던 중 중산동과의 인연을 만들어 준 여자 손님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자기집 마련을 위해 주택청약을  권장하셨고 그 말에 솔깃해 빠르게 청약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고마운 훈수가 지금의 중산동 주민이 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라며 30년 전을 떠올렸다.

자연과 더불어 산행을 좋아하는 그는 92년 9월 여느 때처럼 서울 도봉산에 오른다. 도봉산은 평생 반려자이자 인연을 이어주었다. 지금의 부인으로 만난 지 8개월 만인 93년 5월 부처님오신날 결혼을 했다. 주택청약을 해서인지 어깨에 힘도 들어갔다. 결혼은 안정적인 삶을 안겨줬고 직장을 다니며 돈을 차곡차곡 모으게 했다. 드디어 1994년 내 집인 중산마을 211동에 입주를 한다. 일산신도시도 한창 입주를 할 때다. 고봉산 아래에 자리 잡은 2단지는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1단지 11동에 11월 11일에 입주를 해서인지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1이 7번이나 들어가서 인가 봅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중산마을이 좋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첫 보금자리라는 이유가 더 컸기도 했을 겁니다”라며 입주 당시의 기쁨을 말했다. 
  
입주와 동시에 서울에서의 택시 생활은 그만뒀다. 멀기도 멀었고 가까운 곳에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장을 알아보던 중 중산동과 가까운 덕이동 한 제조업체에 취직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이었던지 육체의 피로는 그대로 스트레스가 되어 몸에 이상 신호를 보냈다. 준비도 못한 강력한 신호였고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다. 38세의 나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위암 선고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받아 드릴수가 없었지만 현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큰 애가 4살, 막내가 막 태어났을 때로 기억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희망이 없을 만큼 좌절도 따라온 시기였습니다. 현재 가족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그 시기는 넘겼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힘이 되어준 큰 딸은 결혼을 했고, 막내는 대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정말 고맙지요”라며 네 식구의 소중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에게의 시련은 한번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하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뒤 이었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인가 보다라고 체념했다. 그래도 산은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했고, 이때 지금의 양봉업을 하게 해준 마음의 은인을 만난다.  
“강원도 홍천을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저를 보고 ‘어디 아프시냐?’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키 174cm에 몸무게가 45kg였으니 허약해 보였을 겁니다. 그러시면서 벌이 생산하는 로얄제리를 권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양봉을 알아봤습니다.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웠던 경험도 있어서 고봉산 아래에 벌통 5개를 놓고 양봉을 시작 했습니다. 그때가 1995년 이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생과사의 인연이 많았습니다”라며 이제는 추억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말 못할 아픔으로 큰 수술을 두 번 정도 더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생명이라는 소중함을 쉽게 놓지 않았다.

중산마을은 그에게 몇 번의 새생명을 안겨준 마음의 고향이다. 자연의 소중함도 알려준 안식처이기도 하다. 26년 중산마을 토박이에게 지역과의 인연에 물꼬를 튼 것은 불과 5년 전이다. 지난 2015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거울이 깨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한 것부터다. 몇 번을 찾아가 요청을 한 끝에 거울은 교체됐다. 이때 적극성을 띤 모습이 주민들에게 성실함으로 보였고 주변의 추천으로 통장을 시작하게 됐다. 입주 21년 만에 진짜 마을주민이 된 것 같은 공동체의 소속감을 느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지금의 중산동 통장협의회장이 됐다. 그 기간 동안 변치 않는 마음이 생겼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주민들을 위해 통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서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예전의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지금의 내가 이곳에 있도록 도움을 준 아주머니들과 중산동민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늘 보살펴 준 부인과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라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일산농협 조합원이자 한국농업경영인 고양시연합회원이기도 한 이만석 통장은 중산동 통장협의회장은 올 6월, 중산2통장은 올해 10월로 마감한다. 아쉬움도 많고 보람도 가득했던 4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인생의 최종목표인 숲 해설사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마음 가득히 담아 자연과 더불어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마음의 해설사가 되기 위해서다. 본인의  지식을 공유하려는 이만석 숲 해설가의 꿀 떨어지는 숲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