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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미국에 우리가 속은 거지… 산 사람 나밖에 없어92세된 1군단 15연대 9중대 이선귀 병사
  • 이영아 발행인
  • 승인 2020.06.29 12:15
  • 호수 1475
  • 댓글 4

17살 입대 한 달 만에 여순사건 진압군 투입, 19살 참전
6월 25일 새벽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전주에서 파주로 이동
월롱전투 팔공산전투 평양비행장전투… 최전선 격전지 투입
포탄 떨어지며 머리에 파편 박히고 고막 다쳐 평생 ‘웽웽’ 
전쟁에선 단순해져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다신 없어야지

전쟁 70주년입니다. 전쟁은 아직도 종식되지 않은 휴전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발견된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소련과 미국이 광복 하루 전날 38선을 긋지만 않았어도 전쟁과 분단은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가치 없게 여긴 미국과 북한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소련이 적당히 이익을 추구했던 협상선이 38선이었습니다. 38선은 결국 전쟁을 낳았고 분단을 낳았습니다. 한국군 62만 명 중 14만여 명이 전사했고 45만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북한군은 60만여 명 중 50만여 명이 사망했고, 사망하거나 학살되거나 행방불명 된 남한 국민이 76만 명에 이릅니다. 70년 전 6월 25일 아침, 전쟁이 났다는 것도 모른 채 전라도 전주에서 파주 월롱 최전선으로 뛰어들었던 한 병사가 있습니다. 1사단 15연대 9중대 이선귀 병사. 고양의 참전군인 중 살아남아 있는 몇 분 중 한 분입니다. 17살에 군에 자원해 한 달 만에 여순사건 진압군으로 투입됐고, 19살에 참전했습니다. 다리엔 총알이 뚫고 나간 상처가 있고, 머리 왼편엔 아직도 포탄 파편이 박혀있습니다. 고막을 다쳐 포탄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를 평생 들으며 92세를 넘기고 있는 이선귀 옹을 인터뷰했습니다. 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속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지운 적이 없다는 이선귀 옹은 소련과 미국이 그었던 38선의 의미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양동 현대아파트에 사는 이선귀 옹은 올해 92세를 맞았다. 매일 한 시간 이상 걷기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이선귀 옹 덕분에 현대아파트엔 걷기 붐이 일어났다. 이선귀 옹은 17살에 담배를 배워 평생 하루 한 갑씩 피웠지만 아직 건강하다. 91세가 넘어서야 3일 한 갑으로 줄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담배를 평생 피우지만 아직 건강한 것도 다 운이라고 여긴다.

70년 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날, 어떤 상황었는지요.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전투훈련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운동장으로 모두 집합하라고 했다. 총과 탄알을 받은 후 바로 전주역으로 뛰어갔다. 전주역엔 화물트럭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린 그 트럭을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아무도 전쟁이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그냥 훈련인 줄만 알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군인들이 피를 흘리거나 부상당한 채 나오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전쟁이구나. 

당시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이라도 하고 계셨는지요. 

전쟁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6·25 아침에도 그냥 무조건 끌고 올라갔지 전쟁터에 간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여순사건 진압군으로 투입됐었고 전쟁 직전까지 진압군으로 주둔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땐 적이 누군지 불분명했다. 전쟁이 터졌고 적이 분명한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달랐다. 

여순사건 진압군으로 투입됐다고 하셨는데, 몇 살에 군대에 들어가셨나요. 

17살에 군대에 들어갔다. 너무 어리다고 안 받아준다고 해서 사정사정해서 들어간 거다. 나는 전라도 순천에 살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 좌익 우익 싸움이 치열했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은 빨갱이로 많이 몰려서 청년들이 끌려가고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집도 너무 가난했고, 군대나 일찍 갔다 오자고 마음먹었었다. 군에 입대해 첫 훈련을 받고 나서 바로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진압군으로 투입됐다. 나는 1사단 15연대 9중대 소속이었고 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은 14연대 소속이었다. 

진압군으로 투입됐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지휘관들은 반란군이 좌익이자 인민군, 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다 같은 군인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반란군도 진압군도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다.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양민들이었다. 밤에는 반란군이 내려와 죽였고, 낮에는 경찰과 진압군이 잡아들이고 죽였다. 양민에겐 경찰과 반란군 진압군 모두 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 무기도 없었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가야 했다. 양민들이 너무 불쌍했다. 진압군 생활은 전쟁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쟁이 일어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는데, 두렵지 않으셨나요.

생각하면 너무 두렵다. 그런데 막상 전쟁터로 나가면 두려움이 다른 생각으로 바뀐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욕구가 강해진다. 두려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는 거다. 단순해진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것. 미군이나 지휘관들은 작전도 있었겠지만, 우리 병사들은 명령하는 대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알받이 역할을 했다. 

첫 전투는 어디였습니까.

파주 월롱전투였다. 내가 속한 1사단 15연대는 최북단으로 투입돼 북한군의 진입을 방어하는 데 투입됐다. 25일 새벽 전주에서 트럭을 타고 서울역까지 갔고, 서울역에서 걸어서 수색역을 거쳐 파주 월롱에 도착했다. 오전 11시경이었다. 파주 월롱 차량 다리 앞에 숨어서 북한군 전차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전차가 나오자 포탄을 쐈다. 포탄 한 방이면 날아갈 줄 알았던 북한군 전차가 포탄 10발을 쏴도 끄떡없었다. 
미군이 교육할 땐 60㎜ 포 한방이면 북한군 전차가 박살난다고 말했는데, 거짓말이었다. 미군이 허위교육을 했구나, 하는 순간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몸으로 막으라는 거였구나 싶었다. 북한군 전차부대가 밀려들었고, 우린 작은 소총 하나로 버티다가 뿔뿔이 흩어져 후퇴했다. 전차가 바로 옆으로 지나는 것도 모른 채 맨몸으로 달렸다. 수색역으로 내려와 노량진까지 달렸다. 노량진에서 서울까지 진입한 북한군의 진입을 방어하는 싸움이 있었다. 밤낮없이 이틀 동안 싸우고 대구 팔공산으로 후퇴했다. 대구 시내 쪽 일부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했었고, 팔공산에서 대구 점령을 막는 최후의 접전이 벌어졌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요. 

팔공산 전투였다. 총도 필요 없는 육박전이었는데 언제 죽을지 몰랐다. 밤낮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가 이어졌다.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인민군은 주로 깜깜한 밤에 기습했는데, 인민군 대부분이 중학생 정도였다. 
밤엔 아군인지 적군인지 보이지 않았고, 머리나 모자를 만져 보고 적군과 아군을 분간해야 했다. 무조건 찌르고 때리고 뒹굴고… 아수라장이었다. 전력이 약하고 어린 인민군이 어마어마하게 죽었다. 북한군의 희생양으로 투입된 것 같았다. 육박전 중에 칼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생각됐다. 팔공산 전투에서 이기고 서울로 진입하는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군의 기운이 가장 충천할 때였다. 서울을 넘어 바로 평양으로 진격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셨을 텐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시다면.

평양비행장 점령을 위해 비행장에 진입하다가 총에 맞았다. 다른 싸움은 산이나 건물 등 방어물이 있었는데 비행장 전투는 소총 하나 들고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비행장 진입 중 다리에 총을 맞았다. 총알이 대퇴부를 관통해 나갔고 총에 맞은 다리를 질질 끌고 후퇴하다가 쓰러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동료가 나를 끌고 나가고 있었다. 동료가 아니었으면 비행장 벌판에서 죽었을 거다. 야전 트럭에 태워진 채 평양역으로 보내졌고, 대구 병원으로 이송됐다. 

상이군인으로 보훈 대상자가 되셨는데 어디를 다치신 건가. 

온몸을 다 다쳤지만 상이군경 인정을 받은 건 귀 뒤의 포탄 파편 때문이다. 월롱전투 직후 충청도 예산 전투가 있었는데 구덩이 진지 안에 있다가 포탄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엥~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 파편이 온몸 곳곳에 박혔다. 바로 기절했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깨어보니 다른 파편은 뺐는데 귀 뒤의 파편은 못 뺀다고 했다. 신경 부위에 파편이 들어가서 빼내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거다. 군의관이 선물로 담고 살라고 하더라. 괴로운 건 엥~하는 소리를 평생 담고 사는 거다. 포탄 떨어질 때 소리가 평생 남아있다. 고막이 다친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고막 다친 건 보훈 대상 등급을 선정하는 데 제외됐다. 파편 박힌 것만 인정돼 6급, 보상이 너무 박하다. 90세 넘어서 병원 진료를 보다가 엉덩이에 파편 하나가 더 있다는 걸 알았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어르신 전쟁에 나가셨었나요 하고 묻더라, 그렇다고 했더니 엉덩이에 파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최전선을 넘나들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15연대 9중대 소속이었는데, 제대할 때 우리 중대 300명 중 남아있는 사람이 30여 명이었다. 15연대 3000명 중 1000명 정도 살아남지 않았나 싶다. 전방으로 계속 투입됐기 때문에 우리 연대와 중대는 더 많이 죽었다. 팔공산 전투에서 가장 많이 죽었다. 평양비행장 점령을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허허벌판을 달려들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에서 사람의 목숨은 개 목숨보다 가볍게 여겨진다. 
전쟁은 그야말로 개판 엉망진창이었다. 무기가 있나, 뭐가 있나, 소총과 총알뿐이었다. 총알은 300발씩 줬는데, 순식간에 다 썼다. 탄약 보급차가 오면 다시 받을 수 있어서, 맨몸으로 싸워야 할 때도 많았다. 내가 살아있는 건 온전히 운이었다. 다소 도움이 된 게 있다면 체력이었던 것 같다. 대구에서 평양까지,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걸어서 뛰어서 다녀야 했는데 나는 그나마 체력이 좋아서 견뎠던 것 같다. 군대 들어가기 전에 권투를 한 3년 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 

전쟁 후엔 어떻게 사셨나요

휴전 6개월 전에 명예제대했다. 다리도 다치고 머리 다치고, 그래서 부상으로 인한 명예제대였다. 아버지는 전쟁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4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나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생계유지가 막막한 상태에서 차량정비기술을 배웠고, 동두천 미군부대에 정비사로 들어갔다. 결혼도 했다.
 동두천에 있던 미군부대가 고양시로 옮기면서 고양으로 왔다. 27살에 미8군 정비사로 들어가 46살까지 20여 년 동안 일하고 그만뒀다. 그때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붐이 일었는데 정비사도 뽑는다고 해서 그만둔 거였다. 돈을 좀 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밖에 일을 못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덕분에 집 한 채는 장만할 수 있었다. 이후 나이가 있어서 정비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경비일 등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건강한 편이어서 80대 초반까지 일을 했다. 

92세인데도 아주 건강하시다. 특별한 건강관리 비법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나를 보면 참 건강은 타고나야 하는 것인가 보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쟁 때 수백 리를 걷고 뛰면서 싸워야 했다. 체력이 없으면 질 수밖에 없다. 나는 17살에 담배를 배워서 지금까지 피우고 있다. 평생 하루 한 갑을 피웠다. 작년에 병원에 갔을 때 좀 줄이라고 해서 한 갑을 가지고 3일 동안 피우고 있는데 아주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뭐 특별한 건강관리법은 없고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이 있는 게 전부다. 나이 들어서도 매일 1시간에서 2시간은 걷는다. 
90세 전에는 고양동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왔는데, 한번 넘어진 후로는 동네 한 바퀴를 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에 걷는 운동을 하는데 건강에 보탬이 많이 된다. 나 때문에 고양동 현대아파트에는 걷기 붐이 일어났다. 동네 노인들 중에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데, 내가 제일 멀쩡하니까 노인들이 따라서 걷는다. 
밥은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한 공기 딱 먹는다.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을 먹고 30분 걷는다. 11시30분에 점심 먹고 또 1시간 걷는다. 저녁은 7시에 먹는다. 음식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는다. 미군부대에서 오래 일한 덕에 스테이크와 감자를 아직도 좋아한다. 한식 중에서는 김치찌개와 소고기를 좋아한다. 아침은 가볍게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밥 한 공기씩 제대로 먹는다. 아침엔 비스켓을 커피에 녹여 먹거나, 콘푸레이크를 우유에 타먹는다. 달걀을 구워 식빵에 얹어 먹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입맛에 맞게 바꿔 먹는다. 

전쟁에 참여하셨던 어르신들은 반공 이념이 강하고 보수적인 편이신데, 그렇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너무 못살아서 그런다. 어렸을 때부터 청년 때까지, 빈곤하게 살아서 일종의 저항심리가 강하다. 정치적으로는 평생 야당 지지자다. 요즘은 좀 변했다. 보상금도 좀 많이 주고 내가 도움을 얻는 정권이 좋다. 야당보다는 힘 있는 여당이 좋다. 
북에 대한 생각은 전쟁세대라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협상이 잘 진행되어도 한순간에 다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북의 공산주의라고 생각한다. 북을 경계해야 하지만 미국을 너무 믿어서도 안 된다. 미국을 의존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미국 승인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여순사건 진압을 할 때도, 전쟁할 때도 내내 속았다는 마음이 컸다. 소련 에 속고, 미국에 속고, 이 나라 저 나라에 휘둘리면서 온 국민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우리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전쟁은 결국 소련과 미국의 싸움이 아니었나, 우리는 방패막이였다. 너무 큰 희생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시다면. 

군대 친구들은 전쟁 때 많이 죽었고, 살아남은 몇몇도 나이 들어 다 죽었다. 제일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삼송리 미군부대 동료들이었는데, 10명 중 나만 멀쩡하다. 8명 죽고 2명 살아있는데 한 명은 병이 깊다. 아내도 30년 전 병이 들어 떠났고, 자식과 손주 빼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에 없다. 참 질기도록 오래 살았다. 여순사건 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가 목숨 걸고 싸웠던 곳, 내가 다쳤던 곳, 그리고 고향 순천에도 한번 가보고 싶지만 친척이고 친구고 다 죽어서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봐야 뭐하나 싶다. 이젠 나이 들어서 먼 길을 가기가 걱정도 되고, 그래서 쉽게 나서지 못한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고 살고 있다.  


 

 

이영아 발행인  lya707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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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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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선야곡 2020-06-30 09:15:12

    이선귀 어르신,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고양시에 생존해 계신 다른 참전용사님들의 이야기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삭제

    • 빙봉빙봉1 2020-06-30 00:39:11

      아! 할아버님...
      역사의 산증인이시네요.
      부디 건강히 계시는 동안
      이야기 많이 전해주세요~   삭제

      • 송수익 2020-06-29 23:58:51

        지금까지 본 기사중 최고의 기사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삭제

        • 목민 2020-06-29 20:11:05

          중학생 인민군과 백병전
          눈물 나네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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