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4차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며 ‘초연결사회’라고 떠들 때가 어제 같았는데, 코로나 19 이후로 유행하는 말은 ‘언컨택트(uncontact)’다. 직역하면, ‘비연결’ 혹은 ‘비대면’이다. 이제는 만나는 것도, 악수하는 것도, 껴안는 것도 두려워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사회적 인간인 인류가 이렇게 자신을 가두고, 휴대폰의 창으로 세상을 엿보는 일이 일상화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삶이 지속되기는 하되, 비루한 삶이다. 연결되지 않으니 일이 없다. 특히 나 같은 강의 프리랜서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 허리를 졸라맸지만, 이제는 그 조금의 기간을 무기한 연장시켰다. 상시 기다림이라는 말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 비루한 고독의 시간 속에서 그나마 존엄을 지키게 하는 것은 독서다.

나는 지금 골방에 틀어박혀 책과 대면(contact)하고 있다. 책이 책장에 꽂혀있을 때는 그저 종이묶음에 불과하지만, 내 손에 쥐어져 펼쳐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책장의 책은 죽어있는 듯 보이지만, 뽑아 책상에 펼치면 살아난다. 대만 작가 탕누이의 지혜를 빌어보자면, 책은 한자로 ‘冊’이라 쓴다. 책의 오래된 형태인 죽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나무를 다듬고 펴서 그 길쭉한 세로 자리에 글을 써서 끈으로 묶은 것이 책(冊)이다. 모양새가 세로이니 영락없이 책장에 꽂힌 책모양이다. 그에 비해 책의 또 다른 한자인 ‘書’는 가로로 쌓여 있는 책을 형상화하고 있다. 책장 칸에 꽂혀있는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 읽히기를 기다리며 눕혀진 모습이다.

독서인(讀書人)은 책을 소장하는 자가 아니라, 책을 꺼내 펼쳐 읽는 사람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비대면을 상징한다면, 책상에 쌓인 책들은 대면을 상징한다. 그러니 코로나 세상은 비대면이지만 독서는 대면이다. 책을 펼치니 숨통이 트인다. 내가 살만하니 책도 살만할 것이다, 무뎌진 사고에 날이 서고, 차갑던 감성에 온기가 돈다. 술에 취한 것보다 더 깊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독서요, 엔돌핀보다 4000배나 높다는 다이돌핀이 생기는 것이 독서다. 다이돌핀은 깨달음으로 감동할 때 뇌에서 발생하는 호르몬이다.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

여행이 불가능해져서 답답한 사람들이여, 책을 펴라. 책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책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책은 과거로도, 다른 나라로도, 미래로도 우리를 데려간다. 비루한 삶이라도 책은 우리를 우주로까지 인도할 수 있다. 여권도 필요 없다. 막대한 경비도 필요 없다. 일이만 원이면 가능하다. 그마저 없다면 책장에 꽂힌 낡은 책을 뽑아 먼지를 털고 펼쳐 보시라. 키케로가 갈파했듯이 “책만 있다면 당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

물론 독서가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 밥은 밥으로 존재하며, 밥벌이의 노력은 준엄하다. 준엄하기에 밥벌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밥벌이의 준엄함이 존재의 존엄함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의 가치를 세울 수 있다. 인간은 밥뿐만 아니라 가치를 먹고 산다. 현재를 살아가지만 현재로만 살 수 없다. 미래가 없다면 꿈도 없을 것이다. 앞날이 안 보여 악몽(惡夢)으로 시달릴 때, 용기 내어 낮꿈을 꿀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책이다.

그러니 책을 읽자. 삶이 비루해질지라도 독서하는 인생을 포기하지 말자. 주머니가 가볍더라도 동네책방을 찾아가 소중한 책 한두 권을 사 들고 돌아가는 발길에 축복 있을진저. 그 낮꿈 꾸는 독자를 책은 배신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의 시대이지만 이 말은 내가 확실히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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