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 기본소득당 대표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화 그만해주십시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이 올라왔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발표가 계기였고, 27만 명 동의를 받는 데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청원이 진행되는 동안 SNS에 새로운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부러진펜운동 #로또취업반대 해시태그 운동은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취업준비생의 기회를 빼앗는다며 시작됐다. 해시태그와 함께 그려진 부러진 연필은 취직하려고 공부하며 노력해왔는데 정규직화 소식에 박탈감을 느낀다는 취지다.

정부는 지난 3년 동안 수없이 합의한 결과라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며 황급히 입장을 냈고, 여당은 청년들의 분노에 변명하고, 제1야당은 분노를 부추기고 있다.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레디앙)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에 반대하는 청년이 있을 것이라 예견한 책이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서열화하는 사회를 당연히 여기고, 각자도생 사회에서 탈출구가 없는 세대 등장을 알리는 책이었다.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선동적인 문구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레디앙, 2007)다. 취업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할 가능성만큼 어렵기 때문에 취직하려 토플책 보는 대신 바늘구멍 통과하기를 강요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짱돌을 들라는 것이었다.

책은 20대에게 숨통을 틔우게 하고, 10대가 생존할 수 있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8만 원 세대』가 발간된 지 13년이 지났다. 책 발간 당시 10대였던 이들이 20대가 되었다. 갈수록 개미지옥 속을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부러진 펜 운동’으로 표출하며 생존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향한 열망에 정치가 무엇으로 답해야할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분노를 이용해서 지지율을 높이겠다며 국민들끼리 싸움 붙이는 정치는 지금 이미 부러진 것들을 못 보게 가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서열화 되어 평등이 부러지고 있는 사실을 가린다. 오직 자신의 노동만으로 먹고 살아야한다 강요하는 각자도생 사회를 가린다. 노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일 할 수 없는 사람 사이 위계를 만든 사회와 노동 여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존엄하지 못한 사회를 가린다.

이미 부러진 것들을 가리려는 자들은 알고 있다. 갈등을 부추기고 다른 이들의 권리 뺏기를 종용하면 그들의 책임을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책임을 정확히 물어야 한다. 노동을 서열화 하고, 직업에 따라 다른 대우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지 못하는 채로 불안한 노동을 이어나가게 한 사회를 만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부러진 것들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로 비정규직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후 정규직보다 더 많은 비정규직이 생겼다. 정부와 기업은 고용안정을 보장하기보다 각종 이유로 소득보장 권리를 제한해왔다. 이제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으로 책임져야 한다. 

기술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경제가 달라지고 있다. 지난 경제위기 때처럼 약한 자들이 부담을 지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 방식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경제에서부터 서로를 적대하지 않고,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책임 있게 논의하는 것, 그것이 부러진 것들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다. 채용비리에 대해 제대로 처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큰 책임을 져야 할 제1야당이 ‘로또취업방지법’ 만들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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