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진 마을학교 소장

백상진 마을학교 소장

[고양신문] 산황산은 예상했던 것처럼 작고 낮았다. 널찍한 공터가 있는 마을회관 어귀에 산으로 향하는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마을길을 돌아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산황동에 터 잡은 집들을 지나야 했다. 낮은 담벼락에 꽃이 핀, 정다운 자연부락이었다. 

3년차 고양시민이지만 산황동을 돌아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놀러가는 동네도, 일을 보러 가는 동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산에 널리고 널린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단 한 채도 없는 동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골프장이 있는 것이 거의 유일한 이름값인 동네. 풍동과 함께 '풍산동'이라는 법정동으로 묶이지만 사람이 적어 선거같은 이벤트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동네. 바로 산황동이다. 

외지 사람들에게야 골프장 말고 아무것도 없는 동네일 테지만, 물론 그 곳엔 많은 것들이 있다. 주민센터는 없지만 마을회관이 있고, 지하철은 없지만 버스가 다닌다. 거대하게 뻗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있고, 그 아래에는 낮은 집들을 잇는 구불구불한 마을길이 있다. 장항동에 '동양 최대의 인공호수'라는 호수공원이 있다면, 산황동에는 '일산 도심과 가장 가까운 자연녹지' 산황산이 있다. 

산황동에 처음 방문한 날, 산황산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고양시에서 내가 알게 된 첫 나무였다. 고양시에 수많은 나무가 있지만, 그 중 단 한 그루와도 연을 맺어본 적 없다는 것을 그 날 깨달았다. 나는 나무를 알지만 동시에 나무를 몰랐던 것이다. 마치 산황동을 아는 동시에 몰랐던 것처럼.

내가 아는 동네에 내가 아는 나무가 생겼다는 사실은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 나무의 이름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나무가 잘 지내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나무가 나도 모르는 새 훼손되지는 않을지, 누군가가 나무를 베어버리려 한다면 나는 어떻게 그걸 막을 수 있는지. 법은 나무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 행정절차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늘 배경처럼 존재하던 나무들에 둘러싸여 살던 나는 비로소 나무라는 존재와 연결되었다. 

돌봄 없이 절로 자라는 생명은 없다.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그 나무는 앞으로도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동시에 나무는 이미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 것이다. 벌레들을, 새들을, 동물들을, 그리고 사람들을. 신선한 공기를 뿜으며, 시원한 바람이 머무르는 그늘을 선사하며, 산을 해치려 드나드는 중장비들을 지켜보며, 그리고 내년 봄이 되면 숨이 벅차도록 아름다운 흰 꽃을 피우며. 

"북아메리카의 오대호에 속하는 이리호는 현재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다. 주변 농가와 하수 처리 시설로부터 막대한 양의 폐수와 화학 비료 성분이 유입되면서 녹조를 비롯한 독성 물질이 넘쳐나게 되었다. 더 이상 식수를 공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2018년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의회는 이리호가 인간처럼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연적으로 진화할 권리'가 있는 주체임을 선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인간에게만 법적 권리가 있다는 전통적 시각을 깨뜨리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었다." -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최근에 읽은, 호수와 나무에도 법적·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지 살펴보는 글의 한 대목이다. 산과 나무와 동물과 바다와 이제 막 연결된 나는 ‘인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설득이 조금 공허하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나보다 앞선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나는 나를 비롯해 우리집 개울이와 버들이네 집 금성무가, 상근이네 집 추이와 초록이네 집 산들이가, 제주바다의 금등이·대포와 생추어리의 새벽이가, 산황산의 산딸나무가 언제나 무사하길 바란다. 우리는 모두 내가 아는 존재들의 무사기원밖에 빌지 못하는 유한한 가능성의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굳이 모두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는 나무, 그리고 아직은 이름이 없는 나무. 산황산의 산딸나무를 만나러 가야겠다. 언제가 됐든, 아직 나무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얘기해봐야겠다. 우리는 왜 나무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돌보아야 하는지. 전세계인이 마스크를 쓰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유례없는 팬데믹 시대에 산과 나무와 동물과 바다를 돌보고 연결된 채로 지내는 일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법과 정치는 그것을 위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내가 아는 나무는 벌써 나에게 큰 바람을 주었다. 

• 이 글은 고양환경운동연합에서 주최한 "산황산 나무심기" 행사의 후기로 작성되었습니다. 고양시민과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산황동범시민대책위원회는 환경을 파괴하고 시민들의 삶을 해치는 골프장 증설 계획에 맞서 지난 8년간 싸움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고양환경운동연합에서 주최한 '산황산 나무심기'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출처: 산황동 골프장 범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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